
세연
어느 날 일어날 수도 있는 작은 일
올해 18살의 나이가 된 독자는 매일 스승들에게 가르침을 받고 있었다. 그런 그가 오늘 아침에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건 검술이었다. 독자의 검술 스승이자 몇 없는 친우인 수영은 먹고 있던 레몬 사탕을 으적으적 깨물며 독자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독자는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난 탓에 어린 시절부터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비록 남들과 비교하면 몸이 약한 탓에 검술에서는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 외에 나머지 학문에서는 뚜렷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다만 본인 스스로가 학문의 별로 뜻이 없는지 툭하면 자리를 비우고 사라진다는 게 문제였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검술수련을 열심히 하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김독자. 야, 김독자!”
정자에 앉아 독자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따뜻한 햇볕을 한껏 받으며 나른한 고양이처럼 몸을 늘어트린 채로 누워 있는 모습은 매일매일 교육을 받는 명문가의 자제랑은 거리가 멀어 보였다. 몇 번이고 하품하며 조는 모습에 수영은 다시 한번 야, 김독자! 하고 불렀다. 수영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자 그제야 독자는 고개를 들어 수영을 바라봤다.
수영의 위로 집안에서 가장 오래된 벚나무가 보였다. 화사하게 만개한 벚나무는 아름답게 흔들리고 있었다. 연못 위로 꽃잎을 아른아른 떨어트리고 있었다. 그 밑에서 수영은 잔뜩 심술이 난 얼굴로 독자를 보고 있었다.
“응, 한수영.”
“……한수영이 아니라, 스승님이겠지!”
“한수영이 한수영이지, 뭐야. 스승님이라고 불러줘? 그렇게 부르면 질색할 거면서. 사람들 많을 때만 스승님이라고 불러주면 되는 거 아니야?”
“그거야 그렇지만, 네 녀석이 싹수가 없잖아!”
“새삼.”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한 독자의 대답에 수영은 목덜미로 손을 가져다 댔다. 열이 잔뜩 오른 목덜미에 차가운 손이 닿자 절로 소름이 일었다.
독자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가끔 이렇게 열이 훅훅 오를 때가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사람의 속을 긁어대고는 했다.
그래도 독자가 다른 사람을 대할 때보다는 나았다. 다른 사람을 대할 때의 그는 싸늘한 얼굴로 타인에게 날이 잔뜩 선 말을 하고는 했다. 잔뜩 비틀린 말을 내뱉는 얼굴은 순하기 그지없어서 절로 소름이 일어날 정도였다. 하얀 얼굴로 콜록콜록 기침하며 타인을 거절하는 탓에 부모조차 간섭할 수 없었고 그의 집안은 황족 바로 밑의 권세가인 탓에 그 누구도 독자의 태도에 말을 얹을 수 없었고 기껏해야 지금 독자의 곁에 남은 건 수영과 독자가 건강하던 시절에 사귄 몇 친구들이 고작이었다.
그런 독자가 유일하게 날이 선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은 한 명이 유일했다. 이 나라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사람.
“김독자.”
유리구슬 같은 검은 눈동자가 수영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수영은 작게 숨을 내뱉고는 독자를 향해 걸어갔다. 독자는 수영이 다가가자 자세를 가다듬고 정자에 앉았다.
“왜.”
“너 찾는 분이 오셨어.”
“하?”
수영의 말에 독자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럼, 이만 저는 물러나겠습니다.”
수영은 그 말을 끝으로 독자의 앞에서 사라졌다. 누가 찾아왔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슬쩍 앞을 봤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작게 숨을 내뱉고 독자는 몸을 옆으로 틀어 손가락으로 바닥을 긁었다.
모처럼 만에 평화를 방해받은 기분이 들었다. 사람이 많은 건 질색이다. 시끄러운 것도 싫다. 차분하고 한적한 고요가 몸을 감싸고 있는 것이 좋았다. 누군가 자신을 찾아왔다는 소식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여기까지 찾아왔다는 것은 분명 자신이 거절해서는 안 되는 사람일 것이다.
“귀찮……아.”
찾아왔다는 사람을 문전박대하는 건 특기였으니 얼굴이나 보고 잔뜩 어색하게 만들고 쫓아내야 한다고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런 태도는 곤란하다.”
어디선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순식간에 독자의 입이 다물어졌다. 들려서는 안 되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황녀님?”
독자의 눈앞에는 이 나라의 제1 황녀 파천검희가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몰래 나온 모양인지 간단하게 차려입은 옷차림이 보였다. 햇볕과 얼굴을 가리기 위해 들고 있음이 분명한 분홍색 양산 사이로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가 독자를 보고 있었다.
이 나라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소문이 도는 파천검희의 유려한 얼굴을 보며 독자는 새삼 뺨에 열이 도는 걸 느꼈다. 칠흑 같은 검은 머리카락과 새까만 눈동자에 자신이 감기는 걸 보며 독자는 땅으로 내려와 넙죽 엎드렸다.
“송구했습니다. 문안 올립니다.”
“됐어. 일어나라. 뭐 하고 있었던 거지?”
파천검희의 목소리에 독자는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아침에 비가 온 탓에 오후가 된 지금에도 땅은 축축했다. 독자가 입고 있던 흰색 옷은 금세 흙으로 더럽혀지고 말았다. 평소라면 탈탈 털어내거나 옷을 갈아입었겠지만, 지금은 파천검희의 앞이라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독자가 허둥지둥 몸을 일으키자 파천검희는 희고 가느다란 손으로 독자에게 손짓했다.
“꽃을……보고 있었습니다.”
독자는 빠른 걸음으로 파천검희의 앞에 섰다. 파천검희는 자신이 형식적으로 구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한 번은 실례를 무릅쓰고 어째서 싫어하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때 그녀의 대답은 주변에 그런 사람이 많으니 굳이 너까지 그럴 필요는 없다는 이상한 대답이었다. 그녀의 말에 의구심을 품었지만, 상대는 황녀였고 독자는 신하 된 자였으니 그녀의 말을 거절할 힘도 용기도 없었다.
독자의 낮은 목소리에 파천검희가 피식하고 웃는 게 보였다. 독자의 이상형에 가까운 미인이 흐드러지게 웃자 독자의 뺨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그래, 꽃을 보고 있었군.”
“…….”
“내가 묻고 싶은 건 그게 아니다. 김독자, 왜 연락이 없었던 거지. 한동안 찾아오지도 않고 말이다.”
“그건…….”
“됐다.”
파천검희의 말에 독자가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보고 싶었지만 찾아갈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잘 해주는 편이었지만 파천검희는 황녀였고 주변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다. 권세가의 집안에서 태어난 탓에 권력에서 꿀릴 것은 없었지만 몸이 약한 탓에 또래의 남성들에 비교해 몸이 좋지 않았다. 심지어 독자는 파천검희와 키가 비슷했다.
자신보다 잘난 사람을 보면 질투심이 든다. 그건 당연한 거였다. 건강하게 태어나지 못한 탓에 뭘 해도 쉽게 지치고는 했다. 남들처럼 몸을 혹사하면 앓아눕고는 했다. 다행스럽게도 머리가 똑똑한 탓에 당하고만 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질투심을 억누를 수는 없었다.
“송구합니다.”
독자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파천검희는 팔짱을 끼고 독자를 보고 있었다. 검은 눈동자 안에 자신이 감기는 걸 보며 독자는 안절부절못함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다시 고개를 들어 올릴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어째서 찾아온 건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의 연락이 없어서 찾아왔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파천검희의 주변에는 사람이 많았으니 자신 하나 정도 없다고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파천검희의 침묵 속에 몸이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독자의 심장이 크게 두근거렸다. 슬쩍 고개를 들어보자 처음에 미소짓던 얼굴에서 점점 표정이 사라지고 있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독자는 계속해서 그녀의 얼굴을 살펴봤다. 나라의 제1 황녀이자 장차 황제가 될지 모르는 이의 얼굴을 계속해서 살펴본다는 것이 불경죄에 해당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됐다, 고개를 들어라.”
파천검희의 말에 독자를 서둘러 고개를 들었다. 눈을 직접 마주칠 수는 없었으니 언저리에 시선을 두고 힐끔힐끔 시선을 보냈다.
“오늘은 어쩐 영문으로……오셨습니까.”
“내 아까도 말한 거 같지만. 통 오지 않아서 왔다고 말한 거 같은데.”
독자는 복잡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파천검희가 시선을 들어 독자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기다란 눈초리에 희미하게 웃음이 잡혀 있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지만, 독자는 그녀의 화가 어느 정도 풀렸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소신은……신은, 송구합니다. 사실은…….”
독자는 말을 잇지 못했다. 몇 번이고 입을 달싹였지만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입을 다물어버렸다. 몇 번이고 찾아뵙고 싶었지만, 용기가 생기지 않아서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아니면 이렇게 당신의 관심을 받고 싶어서 일부러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아니면 보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커서 실제로 보게 된다면 무슨 일을 벌일지 몰라서 그랬습니다? 도대체 뭐라고 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순간 파천검희의 손이 독자의 뺨에 닿았다.
“변명은 됐다. 어쨌거나 안 찾아온 건 사실이지 않으냐. 그러니 따지는 것도 별 의미가 없을 터이니 이만하도록 하겠다.”
“천은 망극하옵니다.”
독자가 고개가 숙였다.
파천검희는 독자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고는 귓가를 간지럽혔다. 검을 잡아 굳은살이 배겨 있는 손이 몇 번이고 닿았다 사라졌다. 독자는 복잡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주인과 신하의 관계를 떠나 남녀관계임에도 그녀는 독자에게 신체접촉을 자주 하고는 했다. 남들의 손길이 닿는 걸 질색하는 주제에 독자는 스스럼없이 만지고는 했다. 몇 번이고 파천검희의 손길이 닿았다 떨어지고는 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입궁해서 그녀를 처음 만났던 그때부터 그녀는 스스럼없이 독자를 만지고는 했다. 그 손길이 싫지 않아 떨어트리지는 않고 받아들였지만, 타인의 눈에 그들이 어떻게 비칠지는 알고 있었다. 정작 파천검희는 아무런 신경도 쓰고 있지 않았지만, 독자는 그들의 시선이 신경 쓰였다. 남들의 시선에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 싫었지만 그들의 시선을 무시하기에 독자는 아직 어렸다. 조금 더 자란다면 추악함에 둘러싸이지 않고 남을 질투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적어도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이 파천검희에게 잘 어울린다는 건 알고 있었다. 건강하지 못해 파천검희와 체구가 비슷한 자신보다는 파천검희를 품 안에 넣고 보듬어줄 수 있고 때로는 나라를 함께 돌보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을 그렇게 먹는다고 해서 쉽사리 그녀와의 연을 끈을 수는 없었다. 몇 번이고 공석이 아닌 사석에서 그녀를 보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실천으로 옮길 수는 없었다. 다른 사람을 대하듯이 벽을 하나 만들어놓고 그곳에 꼭꼭 숨어 나가지 않으며 싸한 태도를 보이게 되면 어느 순간 그녀가 떠나가리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녀의 손짓과 미소에 어느 순간 무너져버려서 원하는 대로 해주는 자신을 알고 있었다.
이번에도 그랬다. 독자는 그녀의 손길이 닿는 대로 그저 몸을 살짝 떨고만 있었다.
“다음부터는 알아서 찾아와라. 그곳은 적적해서 네가 와줬으면 좋겠다.”
파천검희가 고개를 잡아 왔다. 그녀의 손길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독자는 마른침을 삼켜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말을 한 이상 자신은 이른 시일 안으로 그녀에게 찾아갈 것이다. 그러다가 주변의 말을 듣고 또 몇 날 며칠을 그녀의 앞에서 사라질 것이다.
“예.”
“말은 잘해서 다행이군.”
파천검희의 숨이 귓가에 닿았다. 귓가에 작은 소름이 일어났다. 만남은 종종 하고는 했으나 이렇게 귓가에서 속삭이는 건 몇 번 없던 일이라 독자는 순간적으로 몸을 움칠하고 굳혔다. 따뜻한 바람에 귓바퀴에 닿았다.
“황……녀님?”
“쉿.”
입술이 닿았다. 상상 속으로만 그려보던 부드러운 입술이 귓바퀴에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독자의 얼굴에 순식간에 붉은 물이 들었다. 촉촉함을 머금은 입술이었다. 온몸에 불이 붙는 듯했다.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서 귀가 먹먹해질 지경이었다. 머릿속이 뜨거워졌다. 파천검희를 향한 제 마음이 들킨 것만 같았다. 서둘러 그녀의 앞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실례라는 걸 알고 있었고 불경죄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독자의 이성은 마비되고 있었다. 분명 목까지 붉어졌을 것이다.
독자가 자리를 뜨려는 걸 눈치를 챈 파천검희가 손을 뻗어 독자의 팔을 붙잡고는 그대로 독자를 품에 안았다. 부드러운 몸이 느껴졌다.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파천검희의 따뜻한 체온이 가득 퍼졌다. 몇 번이고 그녀가 독자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바닥으로 떨어진 양산 위로 벚나무에서 꽃잎이 하늘하늘 떨어지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오래된 벚나무의 기묘하고 신비한 가지가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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