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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연

체온

유중혁의 인생에 있어 가치 있는 것은 몇 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멸망한 이 세계에서 살아 있는 생명체는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성좌들의 철저한 장난감이 되어 최후의 발악을 하며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중혁은 타인에게 정을 주지 않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했다. 타인에게 정을 주면 그건 곧바로 유중혁의 약점이 된다.

성좌들의 가장 흥미로운 장난감 중 하나인 유중혁은 이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에게 중요한 것을 한둘씩 지워나갔다.

메인 시나리오가 끝나고 또 다른 메인 시나리오가 시작되기 전의 작은 휴식 시간에 유중혁은 임시로 잡은 숙소에서 몸을 눕히고 쉬고 있었다. 기척에 민감한 탓에 타인과는 쉽사리 방을 같이 쓸 수가 없었다. 애초에 유중혁은 사람을 싫어하는 편이었고 동료들은 그걸 알고 있었기에 특별한 일이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유중혁의 방으로 들어오지를 않았다.

오늘도 혼자서 깊은 밤 살포시 잠이 들었었다. 낮은 숨을 유지하며 잠이 들었던 유중혁은 방을 타고 흐르는 이질감에 몸을 일으켰다. 예민한 몸이 경고음을 울리며 누군가 이 방에 침입했다는 걸 알려줬다. 흑천마도를 쥐고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검을 찔러 넣으려는 순간 눈앞에 보인 것은 어린아이였다. 원래대로라면 자신 말고는 아무도 없어야 하는 이 방에 존재하는 낯선 타인에 유중혁은 낮게 신음성을 내뱉었다. 자신의 눈앞에서 방긋방긋 어린아이가 웃고 있었다.

유중혁은 자신의 눈앞에서 몹시 곤란하다는 얼굴로 눈앞의 어린아이를 바라보았다. 어린아이는 유중혁의 난처함이 몹시 즐거운 듯 바라보고 있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는 유중혁이 알고 있는 사람과 굉장히 닮아 보였다.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다는 듯 친근하게 손을 뻗으며 마치 안아달라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중혁아.”

“…….”

유중혁은 침묵했다. 어린아이 특유의 가느다란 미성이 들려왔다. 하얗고 말간 얼굴로 올려다보던 아이는 유중혁이 끝내 말없이 바라보기만 하자 애가 탔는지 유중혁의 근처로 와서 다리를 끌어안았다.

“유중혁, 나야.”

시선을 내려 아이를 뚫어지게 보자 하얗고 말간 얼굴 사이로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가 보였다. 흰색 코트가 끔찍하게 잘 어울리는 아이는 유중혁의 매정한 연인이자 틈만 나면 사라지는 남자인 김독자를 닮았다.

유중혁은 낮게 혀를 찼다. 이유를 짐작하기에는 어렵지는 않았다. 김독자는 메인 시나리오가 없어 시간이 날 때마다 히든 피스를 모으러 사라지고는 했고 가끔은 패널티에 걸려 오기도 했다.

“……네 녀석, 김독자군.”

어린아이가 손짓해가며 유중혁을 가득 껴안았다. 다리 사이에서 찰싹 달라붙은 어린아이 특유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응. 알아봤어?”

유중혁은 허리를 깊게 숙였다. 눈을 반짝이고 있는 김독자와 눈을 마주쳤다. 커다란 눈망울을 보며 낮게 웃고는 김독자를 들어 올려 품 안으로 넣었다.

“네 녀석 말고는 이렇게 대범하게 구는 녀석이 없으니까 말이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냐.”

“모르겠어. 패널티에 걸렸는데 하필 어린아이의 모습이 되어버렸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방법은 ??? 표시가 되어 있어서 전혀 모르겠고 이 상태로는 뭘 하든 어려울 거 같아서 중혁이 너한테 왔어.”

중혁은 눈을 살포시 구겼다. 아무리 그래도 패널티의 해결법도 모르는 채로 이 방까지 왔다는 게 어처구니가 없었다. 김독자는 선천적으로 멍한 구석이 있었다. 머리가 나쁜 것도 아닌데 종종 핀트가 어긋나는 행동을 하고는 했다.

“…….”

“야, 아무리 그래도 그런 눈으로 보지는 마라…….”

“어떻게 해야 풀 수 있는지 전혀 짐작이 안 가는 건가.”

“응.”

김독자가 가슴에 머리를 비벼오기 시작했다. 유중혁은 이 모습도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을 순간적으로 했다. 마치 유중혁의 동생인 유미아의 어린 시절 모습이 떠올랐다.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탓에 유미아는 유중혁이 키웠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런 탓에 품 안에 얼싸안고 다니고는 했다. 어린 동생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매일매일 유미아가 귀찮다며 유중혁을 피해 다닐 정도로 매달리고는 했었다.

“흐음.”

이 상태의 김독자를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유중혁은 김독자를 한참을 바라봤다. 그는 유중혁이 어떻게든 해결을 해줄 거로 생각하는지 품 안에 안긴 순간부터 해사하게 풀어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정말 긴장감이라고는 하나도 키우지 않는 녀석다웠다. 이 상태의 김독자의 상태는 여러모로 위험했다. 이 세계에서 애초부터 어린 것은 문제가 없었지만, 원래의 상태가 어른이었을 경우에는 문제가 발생했다. 어른의 몸으로 익숙해진 전투를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치를 때 분명 괴리감을 느낄 것이다. 이곳은 약간의 실수만 해도 쉽게 목숨을 잃을 수 있는 곳이니 미연의 사태 방지를 위해서라도 김독자의 원래의 모습을 찾는 것이 중요했다.

멸망의 길로 걸어가고 있는 이 세계에서 김독자는 유중혁에게 몇 없는 가치 있는 인간이었다.

“왜?”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본 건가?”

유중혁의 말에 김독자가 머리를 긁적였다. 유중혁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난처하게 흐려진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괜히 괴롭히는 기분이 들었다. 패널티가 걸려서 곤란한 것도 김독자인데 타박까지 할 필요성은 없었다.

“응, 시나리오가 시작되었던 곳에도 가봤고 이것저것 다 해봤지만 안 풀리더라고. 어떻게든 되겠지 싶어서 그냥 너한테 왔어.”

“시나리오가 시작되었던 곳에 다시 가보는 건 어떤가?”

“그러기에는 밤도 늦었고 어린아이에게 이런 시간은 잘 시간이잖아.”

“넌 어린아이가 아니지 않나.”

“이 모습은 누가 봐도 어린아이잖아.”

김독자가 수줍게 웃었다. 하얀 볼에 순식간에 붉은빛이 감돌았다. 그 얼굴이 참으로 가식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때 김독자의 가식적인 얼굴에 속아 이것저것 손해를 본 적도 있었다.

“…….”

유중혁은 김독자를 안은 채로 침대로 다가갔다. 순하게 웃고 있는 얼굴을 내려다보며 순간적으로 꿀밤이라도 한 대 놔주면 안 될까 하는 생각을 꾹 삼켜내고는 침대 위로 김독자의 몸을 올려놨다. 그 상태에서 유중혁은 팔짱을 끼고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김독자는 침대를 팡팡 두드리며 유중혁에게 어서 오라는 듯 손짓하고 있었다.

이 녀석이 이러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말은 안 해도 분명 무슨 해결방법이 있는 거겠지 싶었다. 유중혁은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내 근처 의자 위에 곱게 접어 걸쳐놓고 침대 위로 올라갔다. 김독자는 그사이 품속에서 빈 화면의 스마트폰을 꺼내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저런 걸 왜 보나 싶었지만, 애인의 사생활을 존중해줄 줄 아는 남자인 유중혁은 김독자의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김독자. 잠자리에서 스마트폰을 보면 안 된다.”

“에.”

“눈도 나빠지기도 하고 쉽사리 잠자리에 들기가 어려우니 이제 스마트폰은 내려놔라.”

유중혁의 말에 김독자가 입고 있는 코트 자락에 스마트폰을 넣고 침대로 늘어지는 몸을 누웠다. 그대로 입고 잘 생각인가 싶어 혀를 낮게 차자 주섬주섬 입고 있던 코트를 벗기 시작했다. 가느다란 고사리손으로 옷을 벗고 있는 게 참 우스워 보였다. 몇 번이고 손이 미끄러졌다. 진짜 어린아이도 아니면서 옷도 제대로 못 벗다니 우습다고 생각하며 유중혁은 손을 뻗어 김독자의 코트를 벗겨냈다.

“고마워.”

“다음부터는 혼자 벗도록 해라.”

“알겠어.”

김독자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며 유중혁은 김독자의 코트를 곱게 접어 자신의 코트 위에 걸쳐놨다. 김독자에게 주면 분명 아무렇게나 내버려 둘 것이다. 본인 스스로 정리를 잘하는 것이 침대 바닥에 널브러트리는 것이라 했으니 많은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좋았다.

“밤이 늦었으니 자라.”

유중혁은 김독자에게 이불을 덮어주며 가슴을 도닥였다. 잠이 오지 않는지 반짝이는 눈을 보며 몇 번이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손가락을 빠져나가 순식간에 심장을 두근두근하게 했다.

“난 어린애가 아닌데?”

“그 모습은 누가 봐도 어린아이라고 하지 않았었나.”

“내가 언제?”

“5분도 안 됐다. 내일은 시나리오가 부여됐던 장소로 가보도록 하지.”

유중혁은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위로 올라온 몸을 토닥였다. 어른의 모습일 때는 크기도 크기고 부담되기만 했는데 이런 모습이 되니 꽤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덜미에서 따끈한 숨결이 느껴졌다. 보통 이런 식의 체온을 느끼는 건 잠자리에서의 야릇 야릇한 분위기 풍기며 하는 신체접촉이 전부였기에 색다르다는 생각도 들었다.

“잠자기 싫은데.”

“꼭 잠투정하는 거 같군. 내일을 위해서라도 자는 게 어떤가.”

“조금 더 놀면 안 돼?”

“안 된다. 자라.”

제멋대로 달라붙은 몸을 어르고 달래며 유중혁은 눈을 감았다. 익숙하고 따뜻한 몸 탓에 쉽게 잠이 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좋은 꿈을 꿀 수도 있지 않겠냐는 생각을 하며 유중혁은 고른 숨을 내뱉기 시작했다. 몇 번이고 호흡을 마시고 내뱉으며 잠이 들려는 찰나 뺨을 매만지는 손길이 있었다.

“중혁아.”

눈을 뜨자 김독자가 얼굴을 간지럽히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작은 손의 솜털이 지나가고 있었다. 심장이 화끈화끈 뛰기 시작했다. 유중혁은 손을 뻗어 김독자의 등을 토닥였다.

유중혁은 이 상태라면 김독자가 잠이 들려면 한참이나 남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말이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독자를 품에 안고 일어나 얼굴을 마주 보고 앉았다.

“뭘 해야 잘 거냐.”

“계속 자도 돼. 난 내 사소한 취미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던 것뿐이라고.”

“취미생활?”

“네 얼굴 보는 거. 세상에서 가장 잘난 우리 애인의 얼굴을 보는 건 내 유익한 취미생활이지.”

김독자가 환하게 웃었다. 김독자가 마냥 순하지만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뒤로는 뭘 꾸미는 지도 알 수가 없었다. 웃는 얼굴로 타인을 상처 입히고 사고를 치고 다니고는 했다. 김독자와 사귀게 된 그 순간부터 덫에 걸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넌 내 얼굴이 그렇게 좋은가.”

김독자가 잠이 든 자신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본다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던 일이 놀랄 필요도 없었지만 본인의 입에서 그런 말을 들으니 낯 간지러웠다.

“얼굴도 좋고, 사랑스러운 목소리도 좋고. 나는 네가 좋아, 중혁아.”

살과 살이 맞닿는 촉감이 느껴졌다. 김독자는 유중혁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고양이가 갸르릉 거리듯 얼굴을 비벼왔다.

도를 넘은 사랑스러움에 유중혁의 얼굴에 만족감이 피어올랐다. 그러나 이 얼굴을 김독자가 보면 한참이고 놀려먹을 것이 뻔해 유중혁은 필사적으로 표정을 관리했다. 오히려 얼굴을 팍 구긴 채로 짜증이 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흥.”

김독자는 유중혁의 뺨을 매만지던 걸 멈추고는 머리카락을 살살 만져오기 시작했다. 유중혁은 그 모습을 그저 내려다보다 충돌 적으로 김독자를 끌어당겨 안았다. 몇 번이고 닿았던 체온에 김독자가 얌전히 안겨 왔다.

유중혁은 김독자의 가느다란 몸을 안은 채로 숨을 골랐다. 현 세상에서 유중혁에게 가장 가치가 있는 김독자의 체온은 유중혁을 쉽사리 안정시켜주고는 했다. 몇 번이고 체온을 느끼며 눈을 감으려는 찰나, 김독자가 머리카락 끝을 매만졌다.

“좋아해, 중혁아.”

머리카락으로 부드러운 입술이 느껴졌다. 가볍게 입을 맞췄다 떼어내는 게 보였다. 눈앞의 남자가 눈을 휘며 웃고 있었다.

머리카락 키스
'당신에게 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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