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N
胡蝶夢
대가 없는 소원은 없다.
빌었던 소원은 부메랑이 되어 날아왔으며 잠시 꾸었던 달콤한 꿈은 사라진 시간의 저편으로 녹아버렸다. 욕망으로 인한 결과를 알았더라면 김독자는 결코 그런 소원을 빌지 않았을 것이다.
***
김독자가 거주하는 고시원과 회사의 중간 지점에는 테이블이 네 개밖에 없는 소박한 카페가 있었고, 유중혁과의 첫 만남은 그곳에서 이루어졌다.
교통 카드를 방에 두고 나왔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출근 시각 정류장 앞에서였다. 다행히도 천 원짜리 두 장이 지갑에 남아있었기에 지각은 면했다마는 퇴근할 때가 문제였다. 사실 회사의 누군가에게 사정을 말하고 돈을 빌릴 수도 있었지만 김독자는 그러지 않았다. 회사에서 고시원까지의 거리가 걸어갈 만하다는 핑계를 대면서, 그는 불필요하게 회사 동료와 엮이는 것을 거부했다. 등 뒤로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는 음침한 계약직’이라는 말이 도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함께 있어 봐야 피곤하기만 한 사람들과 어울리느니 좋아하는 소설을 읽으면서 외톨이가 되는 쪽이 더 좋았다.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30분 정도 걸었을 때 어디에선가 향긋한 커피 냄새가 풍겨왔다. 고개를 돌리자 보인 건 인테리어가 깔끔하게 되어있는 작은 카페였다. 이런 곳에 카페가 있구나. 김독자에게는 그다지 중요한 사항이 아니었고 집에 도착하는 순간 지워져도 무방할 정보였다. 괜히 배만 더 고파지는 것 같다는 생각에 서둘러 귀가하려 할 때, 창가 쪽에 앉아있는 어떤 남자를 보았다.
광고의 한 장면을 잘라내어 붙여놓았다고 해도 믿을만한,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찻잔을 들고 만사 흥미 없는 눈을 한 채 창밖 어딘가를 응시하는 남자는 김독자의 기억 어딘가에 존재하는 인물이었다. 그를 알게 된 지는 제법 오래되었지만 마주칠 일이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않았던 사내였다. 고등학교 때부터 천재 운운하면서 들었던 이름을 가진 남자, 현직 프로게이머 유중혁이었다.
얼굴 정도는 얼핏 보아서 알고 있었다. 게임 회사 직원이라고 모든 게이머의 얼굴과 이름을 외우지는 않지만 대한민국 최고의 프로게이머 정도는 알 수밖에 없지 않을까.
멍하니 그를 보며 걷던 김독자가 잘못 깔린 보도블록에 발이 걸려 휘청거렸다. 유중혁의 영상을 처음 보았을 때,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잘생겼다는 건 느꼈지만 넋이 나갈 정도는 아니었다. 실물이 더 나은 건지, 아니면 분위기에 취해 버린 건지 모른 채로 김독자는 잠시 서서 그를 보았다. 돈이라도 있으면 카페에 한 번 들어가 보기라도 할 텐데. 사실 비싼 커피 값을 생각하면 가볍게 생각할 문제는 아니지만 유중혁에게는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다음날 김독자는 교통 카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굳이 그 길을 걸었다. 어쩌면 한 번 더 마주칠 수도 있을 거라는 막연한 희망 탓이었다. 그리 쉽게 볼 수 있을 리 없다고 질책하면서도, 만나서 뭘 하겠느냐고 핀잔을 주면서도 그의 다리는 회사 앞 정류장을 지나쳤다. 저녁에 쉴 수 있는 시간이 그만큼 줄어든다는 걸 알지만 그냥 한 번만이라도 더 그 사내를 만나고 싶었다. 카페가 가까워질 때 심장은 빠르게 뛰었고 빈자리를 보았을 때는 실망의 한숨이 나왔다. 없을 거라고 생각했으면서도 현실이 되자 서운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이후로 6일을 더 걸었다. 그간 모은 교통비로 커피를 주문해도 되겠다고 중얼거리면서, 김독자는 허탈하게 웃었다. 카페가 닫은 적도 있었고 만석일 때도 있었으나 그 남자는 도통 보이지 않았다. 부질없는 짓이라는 걸 알지만 김독자는 한 번만이라도 그에게 말을 걸어 보고 싶었다. 유튜브 영상으로 보는 유중혁은 차갑게만 보였으나 그에게도 따뜻한 온기가 흐를 거리는 건 안다. 게임에서 이긴 후에도 보이지 않는 미소는 어디에 숨어 있을까.
15일을 더 걸었다. 여전히 유중혁은 볼 수 없었고 김독자는 슬슬 지쳐갔다. 직장인에게 피 같은 저녁 시간을 이렇게 허무하게 보내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하루를 더 걸었던 건 왜인지 모른다.
아마도, 어떤 예감이 있었던 건 아닐까.
“프로게이머 유중혁 씨 맞으시죠? 사인 부탁드려도 될까요?”
남자는 고개를 들었다. 운명이었을까, 김독자는 창가에 앉아있는 유중혁을 발견하자마자 급하게 카페로 뛰어 들어갔다. 주문 대신 다른 손님에게 말을 거는 김독자에게 주인의 시선이 날아왔으나 신경 쓸 만한 건 아니었다. 어차피 며칠간 걸어 다니면서 핫초코 한 잔쯤은 사고도 남을 돈이 모였으니까.
조용히 즐기는 혼자만의 시간을 방해받았음에도, 유중혁은 불쾌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팬에게 불편한 심기를 내보일 정도로 까칠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가 내민 손에 미리 준비한 노트와 펜을 내밀자, 능숙하게 사인을 하고는 돌려주었다. 생각보다 이런 요청이 흔한 것일지도.
“이름도… ‘김독자’라고 써주세요.”
한 마디라도 더 붙여보고픈 마음에 요구를 덧붙이자 그는 사인 아래에 깔끔한 글씨로 ‘김독자 님께’라는 문구를 더했다. 하긴, 한국 최고의 프로게이머라면 이런 팬을 한두 번 본 것도 아니려나. 노트를 받아든 김독자가 슬쩍 손을 내밀자, 유중혁은 의미를 알아채고 일어나서 악수했다. 보기와는 다르게 팬서비스가 확실한 듯했다.
“응원합니다. 다음 대회도 힘내세요.”
뻔한 응원을 건네자 그는 담담하게 미동 없던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감사합니다.”
어색하기 이를 데 없는 미소였으나, 김독자는 진심으로 그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좀 더 환하게 웃으면 더 좋겠지만 그는 웃는다는 행위 자체가 어려운 사람처럼 금세 무표정으로 돌아가 버렸다. 이제 가주었으면 좋겠다는 듯 흘끗거리는 유중혁에게 인사를 꾸벅 한 김독자는 부랴부랴 핫초코 하나를 주문하고 비어있는 자리에 앉았다. 유중혁이 앉은 곳과 멀지 않은 곳이었기에 그를 보기에 불편함도 없었다. 김독자는 밖을 바라보는 척하며 차분하게 차를 마시는 남자를 훔쳐보았다. 근처에 갔을 때 풍긴 향은 커피는 아니었고 이름 모를 허브티인 것 같았다. 그가 마시고 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향이 아주 좋다는 생각을 했다.
오래지 않아 유중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잔을 반납했다. 미약한 온기만 남은 코코아를 단번에 마신 김독자는 벌떡 일어나 그의 뒤를 쫓았다.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건지 이성은 브레이크를 걸지 않았고 김독자는 급하게 달려 유중혁의 팔을 잡아챘다.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무슨 용무로……?”
김독자는 그에게서 언뜻 보이는 부정적인 감정을 외면했다. 날카로운 눈초리를 받아넘기면서, 목을 간질이는 수천 마디의 말 중 하나를 꺼냈다.
“차… 무슨 차 마셨어요? 향이, 좋아서요.”
“……?”
그때 유중혁이 느낀 감정이 어이없음이라는 것 정도는 누가 봐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
“정말이지, 멍청한 말이었다.”
“그만 우려먹어라. 너한테 한 마디라도 더 붙여보고 싶은 마음에 아무 말이나 꺼낸 거였어.”
유중혁에게서 차를 받아든 김독자가 불평했다. 그때 그가 마시던 것과 같은 향이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시자 어딘가 마음이 편안해졌다. 식탁의 맞은편 의자에 앉은 유중혁이 한쪽 옆에 쌓여있던 쿠키를 휙 밀어주었다.
“먹어라.”
“또 팬에게 받았냐?”
입맛이 까다로운 유중혁은 기성품을 좀처럼 입에 대지 않는다. 심지어 본인의 요리 솜씨도 좋은지라 쿠키를 굽겠다고 마음먹으면 웬만한 맛집 뺨칠 정도의 것을 만들어낼 것이다. 투덜거리기는 하지만 쿠키를 입에 문 김독자는 고고하게 차를 마시는 유중혁을 보았다. 그날 그렇게 붙잡아서 대화를 이어가고 시간을 빼앗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렇게 함께 있을 수는 없겠지. 실없는 대화와 가벼운 만남으로 수 개월을 소모하여, 김독자는 유중혁의 ‘친구’가 되는데에는 성공했다.
그러나 그는 내심 그 이상을 바라고 있었다.
“네가 아니라 모르는 사람이 먹어치우는 걸 알면 서운해하지 않을까?”
“버리는 것보다는 낫겠지.”
모르는 사람이 듣는다면 매정한 말이었다. 하지만 미각이 섬세한 유중혁의 입장에서 보면 상당히 처치 곤란인 것들이었다. 먹을 것을 보내지 말아 달라는 정중한 부탁에도, 그 사실을 모르는 팬들은 종종 먹을 것을 보냈고 받지 않을 수도 없다는 게 문제였다. 유중혁이 받은 것들은 대부분 그의 여동생인 유미아와 친구들이 먹곤 했지만, 지금은 김독자의 입으로 들어가는 게 더 많았다.
“넌 프로게이머로도 성공했지만 음식점을 차려도 성공할 거다. 혹시 카운터 볼 사람 필요하면 불러. 회사를 그만두고서라도 도와주러 갈 테니까.”
“헛된 망상이로군.”
유중혁이 무뚝뚝하게 투덜거렸으나 이야기에 반응해준다는 것 자체가 김독자에게 호의를 품고 있다는 증거였다. 무표정한 얼굴로 차를 마시는 사내는 전보다는 편안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프로게이머가 된 이후로 이런 사소한 대화를 나눌 상대는 동생밖에 없었다고 하던가. 쓸데없는 대화는 필요 없다고 하지만 김독자가 방문하여 미주알고주알 회사 이야기를 늘어놓으면 관심 없는 듯하면서도 들어주곤 했다. 그가 내어주는 일상의 사소한 시간은, 어쩐지 자신을 특별하게 생각해주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네 대회가 끝나고 난 후에 제주도 여행이라도 가는 거 어때? 기분 전환도 할 겸.”
“상관은 없다만 내 일정을 기다려서 갈 만큼 친구가 없는 건가, 김독자.”
“회사 경품으로 괜찮은 호텔 숙박권을 받았거든. 나에게 친구가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너도 내가 아니면 그런 곳에 놀러 갈 일은 없잖냐.”
어차피 유중혁의 주위에도 같은 팀에 소속되어있는 팀원들밖에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으니까. 그는 별달리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그대로 수긍해주지도 않았다.
“서른이 목전인데 애인을 사귀는 쪽이 좋지 않겠냐는 말이다. 보통은 애인과 가지 않나?”
손에 들고 있던 초콜릿 쿠키가 깨어지는 소리가 났다. 딱딱한 쿠키인 건지 소리가 괜히 더 크게 난 것 같아서, 김독자는 머쓱한 척 그것을 입에 넣었다.
“내가 애인 만들어서 잠수타면 넌 혼자잖아.”
“쓸데없는 걱정이다.”
유중혁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사실, 따지자면 그렇다. 유중혁은 오랜 친구도 아니며 그가 김독자에 대해 알게 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다. 아마 부담스러울지도 모른다. 유중혁은 김독자와의 관계를 어디까지나 ‘친구’에 국한하고 있고 그 이상은 주지 않을 것이다. 김독자 역시 처음에는 그저 대화 한 마디 나눠보는 게 목적이었건만 시간이 갈수록 욕심을 부리게 되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더 깊은 관계를 원했다.
내 인생의 첫 번째 애인이 네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유중혁의 시선에서는 얕은 친분 외의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이 김독자를 메마르게 했으며 음험한 욕망을 싹틔우게끔 했다. 과욕이라는 걸 알면서도 한 번 터져버린 마음은 자제력을 잃었고 더는 멈출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그에게서 멀어지거나, 아니면 원하는 관계가 되거나. 전자의 선택권은 김독자에게 있었으나 후자는 아니었다. 자신 외에는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세계에 떨어진다면 그의 마음을 가져올 수 있을까. 그 누구에게도 시선을 돌릴 수 없는 세계라면.
“자고 갈 건가?”
“어차피 미아도 수학여행 가서 혼자잖아. 나도 돌아가 봐야 혼자고.”
이미 상황을 예상이라도 했던 건지, 냉장고에는 두 명의 성인 남성이 먹을 양의 식자재가 있었다. 그날 유중혁이 해준 닭요리는 김독자가 먹어본 그 어떤 것보다도 맛있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유중혁은 말이 없었으나 김독자의 이야기를 무시하지는 않았다. 닭고기 한 점을 젓가락으로 집어 입에 가져가는 유중혁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그를 향한 갈망이 점점 깊어지는 것을 느꼈다. 저 손가락, 오물거리는 입술까지 모조리 자신의 손길에 가두고 싶었다. 전할 수 없는 사랑은 점차 독이 되어갔고 그 방향은 조금씩 삐뚤어지고 있었다. 차라리 그가 이 마음을 받아준다면 순수한 사랑으로 지켜갈 수 있지 않을까 싶으면서도 그 안의 두려움이 김독자를 막아섰다. 관계를 쌓아 올리는 건 몹시 어렵고 긴 시간이 필요하지만 무너뜨리는 건 한순간이다. 말 한마디의 실수로 김독자는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건널 수도 있었다. 이제는 그를 잃는 것이 너무도 괴로웠다.
“침대에서 자라, 김독자.”
“너는?”
“소파에서 자겠다. 너는 손님이니까.”
유중혁의 키와 비교하면 모자랄 길이의 소파를 돌아본 김독자가 씩 웃었다.
“같이 잘래?”
“사양하지.”
농담처럼 던지긴 했으나 진심이었다. 유중혁의 방으로 쫓겨난 후 김독자는 적막을 느꼈다. 분명 한 지붕 아래에 있는데도 차가운 벽에 가로막혀있는 사이라는 게 아프고, 외롭고 우울했다. 응축된 감정의 덩어리는 어둠에 잠식되어 갔고 싸늘한 침대에 누워 애써 잠을 청하던 김독자는 새벽 두 시가 넘어가도록 뜬눈으로 시간을 보냈다.
중혁아.
너를, 너무나 좋아해.
이 속삭임이 그의 꿈으로 날아가 닿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침대에서 일어난 김독자는 조용히 방 밖으로 나와 거실로 향했다. 소파에 웅크린 채 잠들어있는, 아무것도 모르는 이가 은은한 달빛 아래에서 김독자를 유혹했다. 요 며칠 늦게까지 게임을 하느라 피곤했다고 하던 그는 김독자가 바로 앞까지 다가왔는데도 깊이 잠들어 있었다. 곡선을 살짝 그리는 머리카락이 이마로 흘러내렸고 감은 눈 아래로 고집스럽게 다문 입술이 보인다. 언젠가 스치듯 만져본 부드러운 뺨을 쓰다듬고픈 충동이 일었으나 김독자의 시선은 그 아래로 향했다. 길게 뻗어있는 목을 보는 순간, 심장이 울렁거리면서 가늘게 몸이 떨렸다. 그저 본능적으로, 그곳에 입을 맞추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깊이 잠들었으니 깨지 않을 것이다. 깨지 말아라, 제발. 비밀스러운 사랑을 쥔 채 그에게 다가가자 유중혁에게서 나던 좋은 향이 바짝 가까워졌다. 온기를 품은 목에 입술이 닿았을 때, 김독자는 그 달콤한 향에 파묻혀 질식할 것만 같았다.
그 순간만큼은 유중혁이 자신의 연인이 된 것만 같았다. 눈을 뜨면, ‘무슨 일이냐, 김독자.’라며 조금은 쑥스러운 듯 옅게 웃어줄 것처럼.
“…김독자?”
귓가에 들려온 목소리는 환청이 아니었다. 흠칫 놀란 김독자는 급히 물러나다 바닥에 엉덩이를 찧었다. 베란다 창으로 들어오는 달빛에 보이는 얼굴은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 놀란 표정이었다. 어떤 변명의 여지도 없는 행위를 들켰다는 두려움에, 김독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일어나서 도망쳤다. 등 뒤로 유중혁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으나 김독자는 멈추지도, 돌아보지도 않았다. 대충 구겨 신은 신발을 신고 뛰쳐나간 김독자는 유중혁의 집에서 멀어질 때까지 한참을 달렸다. 가슴이 답답하고 목이 따끔거릴 때까지 달리던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다 길 한가운데에 쪼그리고 앉아 자책했다. 과욕이 불러온 참사라고 할까. 이제 분명히 끝이다. 어렵게 쌓은 관계는 잘못 건드린 손가락에 의해 모든 걸 잃고 무너질 것이다.
그날 김독자는 소원을 빌었다. 누구를 향한 것인지도 명확하지 않은 소원은 어느 누군가에게는 닿았을 것이다. 창이라도 있다면 조그마한 창문을 열고 달에게, 별에게 빌었으련만 복도로 뚫린 창문 밖으로 보이는 건 어두컴컴한 건물 내부였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눈을 감은 채, 김독자는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유중혁이 모든 걸 잊어버리기를,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이가 이 세계에 단 한 명 뿐이기를… 그는 끝없이 소원을 되뇌었고 세계의 마지막이 오는 한이 있더라도 그를 잃지 않길 바랐다.
언제 잠이 들었을까. 알람 소리에 눈을 떴을 때, 김독자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어두운 고시원 침대 구석에 누워 있었다. 복도에서 들어오는 빛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컴컴한 방에서 몸을 일으킨 김독자가 불을 켰다. 어쩐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학교 가야지.”
벽에는 전날 챙겨둔 교복이 깔끔하게 걸려있었다. 잠시 멍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던 김독자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세계의 모든 것이 바뀌어있었다.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오는 기억은 생소했다.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 열다섯 살의 자신은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이라는 웹소설을 읽고 있었다. 인기가 없어 점점 조회 수가 떨어지다가 지금은 자신 외에는 아무도 읽지 않는 소설. 그 소설을 읽으면서, 김독자는 삶을 배웠고 세상과 싸우는 법을 익히기도 했다. 소설의 주인공은 어린 김독자의 유일한 친구이자 형이었으며 때로는 아버지와도 같았다. 고독한 세계의 회귀자, 아무도 이해해주지 못하는 절망 속에서 기나긴 회차를 살아가는 사내를 지켜보는 이는 김독자가 유일했다.
주인공의 이름은 ‘유중혁’이었다.
그리고 그는 어제까지 김독자와 차를 마시며 소박한 이야기를 나누던,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혼란스러웠다.
지금의 그는 분명 성인도 되지 않은 고등학생에 불과했으나 유중혁과 만났을 때는 스물여덟 살의 직장인이었다. 어제의 유중혁은 현실에 존재했지만 지금은 인기 없는 웹소설 속의 주인공이었으며 알지 못하는 머나먼 세계로 떠나버렸다. 그가 외롭길 바랐고 자신만을 원하길 바랐으나 이런 형태는 아니었다. 김독자는 유중혁의 이야기를 읽는 유일한 독자였고 유중혁은 김독자의 삶을 지켜주는 유일한 ‘등장인물’이었다.
“이게, 아니야. 유중혁은, 분명히 있었어. 어제까지만 해도. 있었잖아, 내 친구로.”
자기 전에 스마트폰을 놓아두던 공간은 텅 비어있었다. 유중혁의 집에 두고 왔다는 기억과 동시에 혼선되는 것은 성인이 되기 전의 기억. 혼자 사는 고등학생이 핸드폰 같은 사치품을 가질 수는 없었기에 아무런 연락 수단이 없던 시기였다. 그 무렵의 김독자는 멸살법을 읽는 것조차 학교 컴퓨터실에서나 할 수 있었고 한 달 한 달을 아끼면서 살아가야 하는 학생에 불과했다. 급하게 공중전화 부스를 찾은 김독자는 기억하던 유중혁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없는 번호였다.
무엇이 현실인지 인지할 수 없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허망한 시선을 떨어뜨리던 김독자는, 차라리 이 미친 기억을 잊어버리기를 바랐다. 처음부터 유중혁은 웹소설의 주인공이었고 그와 함께하던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모든 걸 지워버리고 싶었다. 악몽에서 깨어날 수 없다면 차라리 꿈의 일부가 되고 싶었다.
***
“키스에 붙은 의미를 알아?”
“모른다.”
“입술이 사랑이라는 건 알잖아.”
검을 손질하는 유중혁은 묵묵부답이었다. 워낙 한결같은 녀석이다 보니 서운하지도 않다. 유중혁은 귀찮은 듯 시선도 주지 않았으나 김독자는 조잘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뺨에 하는 건?”
“모른다. 시끄럽다, 김독자.”
“이마는?”
“…….”
“목은?”
슬슬 ‘죽인다’는 말이 나올 때라고 생각했는데, 예상 밖의 대답이 나왔다.
“…알고 있다.”
“그건 어떻게 알아?”
입술에 하는 키스의 의미조차도 관심 없는 얼굴이던 녀석이 어떻게? 세계가 멸망하기 전에 어디에선가 들었던 걸까? 아니면 여동생인 유미아가 떠드는 말을 주워듣기라도 한 걸까? 의아함이 담긴 김독자의 질문에 유중혁은 잠시 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기억 어딘가에 남아있었다.”
그의 손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중혁의 옆에 앉아있던 김독자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그가 보내는 시선이 거슬렸던 것인지 유중혁은 검을 검집에 넣고는 그를 노려보았다.
“방해하지 말고 꺼져라, 김독자.”
“방해하는 거 아니야, 인마. 옆에 앉아있지도 못하냐?”
“그게 방해다.”
“내가 내 애인 얼굴 감상 좀 하고 싶어서 곁에 있겠다는데 그게 왜?”
정말로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이 묻자 유중혁은 혀를 쯧 하고 차더니 더 반박하지 않았다. 다행히도 애인 운운하며 밀어붙이는 데에는 불평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유중혁은 보기보다 섬세한 면이 있었고 자신의 연인에게는 다정한 면이 있는 남자였다. 김독자는 그의 그런 의외의 모습을 상당히 좋아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키스해도 돼?”
“…김독자.”
살벌하게 느껴질 법도 한 시선이었으나 그 눈빛은 평소와는 달랐다. 화를 내거나 불쾌함을 표하는 게 아닌, 무언가 감정을 숨기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를테면, 부끄러움이라거나.
“그런 건 나에게 허락을 구하지 않아도 된다.”
무심한 듯한 말이지만 그 무엇보다도 애정이 넘쳐났기에, 김독자는 웃었다. 가까이 다가갈 때까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은 긴장하고 있다는 걸 잘 안다. 힘겨운 전투의 냄새로도 가리지 못한 특유의 체취가 코를 간질였다. 꾹 다물고 있는 도톰한 입술 대신에, 김독자는 좀 더 낮춘 시야가 닿은 쪽에 입을 맞추었다. 어딘가 처음이 아닌 것만 같은 키스를, 유중혁은 가만히 받아들여 주었다.
다시는 그를 놓치지 않겠다는 생각이 언뜻 스쳐 갔으나, 김독자는 그저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의미로 해석했다. 이 세계의 마지막이 오더라도 유중혁과 함께할 테니까.
***
김독자가 두고 간 스마트폰은 자신의 방에서 울렸고, 유중혁은 전화를 끊은 후 잠시 생각했다. 김독자는 자신의 사는 고시원이 어디인지는 말하지 않았으나 처음 만난 날 유중혁의 경계를 풀기 위해 명함을 주었다. 미노 소프트라고 했던가?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인터넷에 검색해보면 분명 회사 위치 정도는 나올 것이다. 김독자라는 이름이 흔한 것은 아니니 찾아가면 그를 불러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겠지.
아직도 목에 온기가 남아있는 듯했다. 김독자는 무슨 생각으로 키스를 한 걸까. 그가 자신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았으나, 그저 친구로만 생각할 거라 여겼던 터라 조금은 신기했고 또 조금은 기뻤다.
체온이 조금 오른 목을 매만지던 유중혁은 문득 그 키스의 의미가 궁금해졌다. 원래의 그였다면 키스의 의미 따위 궁금해할 이유는 없었겠지만, 김독자의 것은 달랐다.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다면 그에 답해주고 싶었다. 스마트폰의 인터넷 페이지에서 빠르게 검색한 유중혁의 눈에, 결과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당신을 원해요.」
그 짧은 문장을 보는 순간 한여름이 온 것처럼 후끈해졌다. 뜨거워진 얼굴을 어찌할 줄 모르고 있던 유중혁은 다시 한 번 문장을 눈에 담았다. 귀까지 달아오르면서 가슴 안쪽 어딘가가 간질간질해졌기에, 그는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웅크렸다.
굳이 목에 키스를 한 이유는, 김독자 역시 의미를 알고 한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유중혁은 움찔거리는 입꼬리를 붙잡고는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당장 답을 전해주고 싶었지만 내일까지는 기다려야 한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유중혁은 억지로 눈을 감고는 다음 날 김독자에게 전해줄 말을 몇 번이나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쉽지는 않아도 김독자의 도둑키스보다는 용기가 필요하지 않을 말을.
나 역시 너를 원한다고.
목 키스
'당신을 원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