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찌르
마왕님은 제멋대로
마왕이 인간을 공격하고 용사가 마왕 성에 쳐들어가는 것, 전부 서적에서만 존재하는 옛날 일들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마왕은 언젠가부터 인간계에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정확한 이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 당시 사람들은 마왕이 무슨 일을 꾸미는 것이라 생각해 용사 파티를 마왕 성에 보냈다. 그들은 다친 곳 하나 없이 무사히 마을로 돌아왔지만, 임무는 실패했다. 마왕 성으로 가는 포탈이 완전히 닫혀 근처에 가는 것조차 실패한 것이다. 마법사들이 모여 포탈을 다시 열어보려고 했지만, 결과는 하나 같이 실패였다. 그 뒤로 사람들은 군대를 모아 마왕의 공격을 대비했지만,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마왕은 쳐들어오지 않았고 몇백 년이 지난 현재까지 마왕의 모습을 본 자는 없다고 한다.
그게 역사서에서 본 내용이었다. 그런데…. 중혁은 자신의 침대에 앉아 있는 검은 옷의 남자를 쳐다봤다.
“당신이 마왕이라고?”
“응, 맞아.”
집을 비운 사이 맘대로 집에 들어온 남자는 본인을 마왕이라고 소개했다. 증거도 없고, 본인 입으로 마왕이라고 소개를 하는 남자를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집 밖으로 나가보려 해도 무슨 수를 쓴 건지 문은 힘껏 밀고 당겨 봐도 꿈쩍하지 않았다. 중혁은 문을 등지고 침대에 앉아 있는 남자를 자세히 살폈다. 새까만 옷과 다르게 흐릿한 인상이 이질적인 느낌을 주고 있었다. 남자의 체구는 일반 성인 남성과 비교 했을 때 살짝 왜소한 정도. 앉아 있어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일어서도 중혁과 비슷하거나 조금 더 클 것 같았다. 그런데 저런 남자가 마왕? 남자가 입술을 끌어올려 웃었다.
“지금 이 모습은 마법으로 바꾼 거니까 외관으로 판단하는 건 도움이 안 될 걸.”
중혁은 주춤 뒤로 물러났다. 입 밖으로 내지 않았는데 어떻게?
“마족들은 대부분 생각을 읽을 수 있거든.”
중혁은 태연한 얼굴로 말을 하는 남자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훑어봤다. 정말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건가? 아니면 그냥 우연의 일치….
“읽을 수 있다니까.”
“…멋대로 읽고 대답하지 마라, 불쾌하니까.”
“그래.”
중혁은 순순히 대답하는 남자를 쳐다보다가 옆 선반에 있던 빈 꽃병을 슬쩍 집어 들었다. 그리고 재빠르게 남자를 향해 던졌다. 정말 저 남자가 마왕이라면 이런 것쯤은 아무렇지 않을 것이다. 마왕이 아니라고 해도 남의 집에 허락 없이 들어와 마왕을 사칭한 놈이 좋은 놈일 것 같진 않으니 이 정도는 괜찮을 거다. 빠른 속도로 날아간 꽃병은 남자의 근처까지 다가갔지만, 얼굴을 몇 센티 정도 남기고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의해 튕겨 나왔다. 방어막…? 남자는 그대로 바닥에 떨어지는 꽃병을 손으로 잡았다.
“이런 걸 던지면 위험하잖아.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고작 그걸로 위협을 느끼는 건가?”
“아니, 나 말고 너 말이야. 인간들은 이런 거에 쉽게 다치잖아. 상처가 낫는 속도도 느리고.”
중혁은 주변을 경계하며 남자를 노려봤다. 일단 마법을 쓴다는 것부터 앞에 있는 남자가 평범한 놈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마법 서적은 일반 서민들이 쉽게 살 수 없을 만큼 비싸니까. 거기다 조금 전 남자는 아무런 말 없이 마법을 썼다. 중혁이 마법에 대해 아는 것이 많은 건 아니지만, 주문 없이 마법을 쓰는 게 엄청난 일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상위 마법사, 아니면 왕실 마법사 수준….
그런데 그런 놈이 왜 중혁의 집에 멋대로 쳐들어와 마왕 타령을 한단 말인가. 마왕 사칭이라니, 걸린다면 죄를 물어 지하 감옥에 갇힐 수도 있는 중범죄였다. …도저히 믿고 싶지는 않지만, 정말 저 남자가 마왕이라도 되나? 그렇다면 몇백 년 동안 모습을 감추다가 갑자기 자신의 집으로 온 이유는 뭐지?
“이유? 별로 멋진 건 아닌데 듣고 싶어?”
“…멋대로 읽지 말라고 했다.”
“아, 그랬지.”
남자는 중혁의 의심스러운 눈초리에 웃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중혁은 다가오는 남자 보며 허리에 차고 있는 검 손잡이를 꽉 붙잡았다. 마을 상점에서 구매한 일반 철검이었다. 남자가 마법을 쓰는 한 근접전은 불리하겠지만 가만히 손 놓고 당하는 건 중혁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최소한 발버둥이라도…….
손에 들고 있던 꽃병을 원래대로 선반 위에 올려놓은 남자는 중혁의 앞에 멈춰 섰다. 남자는 예상대로 중혁보다 조금 더 클 뿐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엄청나게 크게 보였다. 보이지 않는 위압감에 짓눌려 버릴 것 같았다. 중혁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뭘 하든 절대 이길 수가 없는 상대였다. 그렇기 때문에 중혁은 이 남자를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검 손잡이를 꽉 쥐고 있는 중혁의 손이 달달 떨렸다. …마왕.
“이제 믿어주는 거야?”
남자는 방긋 웃었다. 중혁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조금 전까지도 숨통을 조이던 위압감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심장이 거칠게 요동쳤다.
“미안, 힘 조절이 쉽지 않네.”
숨을 고르던 중혁은 앞에 선 남자를 노려봤다. 남자는 전혀 미안해 보이지 않는 표정이었다.
“대신 네가 궁금해하던 이유에 대해 알려줄게.”
남자의 눈이 둥글게 휘어졌다.
“포탈을 닫은 건 내가 싸우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 그래. 인간하고 싸워봤자 실력 차이가 명백하니 재미가 없기도 하고. 너희 인간들도 굳이 개미와 싸우지는 않잖아? 게다가 난 마왕이 될 생각 없었어. 마계가 강자 위주라서 어쩌다보니 실력이 좋은 내가 마왕이 된 것뿐이지.”
생각지도 못한 이유였다. 애초에 이 얘기를 덥석 믿어도 괜찮은 건가? 남자는 마음대로 하라는 표정으로 어깨를 한번 들었다 놓았다.
“그 뒤로 몇백 년 동안 어쩔 수 없이 마왕 역할을 해봤는데, 자리를 탐내는 녀석들 처리하는 걸 빼면 딱히 할 일이 없어. 전대 마왕들이 왜 쓸데없이 인간한테 관심을 보였는지 알겠더라.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심심해서 참을 수가 없던 거겠지.”
남자는 중혁의 머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남자의 손은 움찔거리는 중혁의 얼굴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가 긴 폭포수 같은 머리칼에 닿았다. 관리하지 않았음에도 결 좋은 까만 머리칼이 손가락 사이로 사르륵 흘러내렸다.
“그래서 나도 한 번 따라 해보기로 했어. 성에서 영상구로 인간들의 삶을 지켜보기 시작했지. 인간들은 조용하고 별 볼 일 없는 삶을 살고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계속 보게 되더라고. 재미가 없는데 재미가 있는 이상한 느낌이었어. 그렇게 하릴없이 인간들 삶을 구경하다가 너를 발견한 거야.”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던 남자는 고개를 들어 중혁의 눈을 쳐다봤다. 가지런히 놓인 먹색의 눈썹이 살짝 움츠러들었다. 처음에는 이 외모 때문이었다. 어차피 그의 눈에 인간은 전부 비슷했고 이왕 보는 거 아름다운 쪽이 보기 좋을 것 같아 중혁을 지켜보기로 했다. 자르지 않아 허리까지 오는 까만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나부끼고, 짙은 먹색 눈썹 밑 깊은 눈동자는 보는 이를 홀리는 것만 같았다. 얇은 듯 살짝 도톰한 입술은 습관적으로 입술을 깨무는 버릇 탓에 늘 발간 혈색이 돌았다. 남자의 입매가 기분 좋게 말려 올라갔다.
“쭉 너를 지켜봤어. 네가 부모를 잃었을 때도, 아카데미 입학을 포기했을 때도, 몬스터 토벌에 나갔다가 수없이 죽을 뻔했을 때도, 전부 다.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네 모습에 나는 눈을 뗄 수가 없었어. 네 삶이 너무나도 눈 부셔서, 찬란해서.”
수없이 많은 죽을 고비를 넘기며 살아가는 중혁의 모습은 마계에 사는 지루한 한 남자를 매료시켰다. 어느새 중혁을 지켜보는 것은 남자의 일과가 되었다. 남자는 중혁의 머리카락을 한 움큼 집어 코 밑에 가져다 댔다. 아무런 향기도 나지 않았다. 그게 지독히도 중혁다웠다. 중혁은 천천히 고개를 드는 남자의 표정을 보며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네게 마음을 빼앗겼어.”
중혁은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오소소 돋는 것을 느꼈다. 몇백 년 만에 갑자기 나타난 이유가….
“응. 널 마계로 데려가려고. 나랑 같이 마계로 가자.”
중혁은 눈을 둥글게 휘며 대답하는 남자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잠시 가슴이 들썩거릴 정도로 크게 심호흡을 한 중혁은 빠르게 검을 뽑아 남자를 향해 휘둘렀다. 목을 노리고 뻗은 손은 허무할 만큼 간단히 붙잡혔다. 남자는 반대 손으로 중혁이 쥐고 있는 검을 빼앗았다.
“조심해. 반격 마법 때문에 공격을 받으면 자동으로 반격할 수도 있으니까.”
놀라지도 않은 남자의 태연한 음성을 들으며 중혁은 붙잡힌 손목을 빼내기 위해 손을 비틀며 애를 썼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리 세게 잡지도 않았는데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남자는 중혁의 눈에 가득 찬 분노에 작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선뜻 반기며 따라오지 않을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이런 거친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조금 전 힘을 살짝 드러낸 건 의욕을 상실하게 만들려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눈에 힘을 가득 주고 있는 모습을 보니 실패한 모양이다. 어깨가 여전히 작게 떨리고 있는 것을 보아 완전히 두려움을 떨쳐낸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역시 특이한 인간이었다, 유중혁은. 남자의 입술이 슬쩍 꿈틀거렸다.
“가기 싫어? 여기 생활보다 편할 텐데. 혹시 고생하는 걸 즐기는 취향이야?”
중혁은 입술을 짓씹다가 말없이 반대 주먹을 휘둘렀다. 어쩔 수 없이 손을 놓아준 남자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알았으니 진정하라는 듯이 양손을 들어 보이는 꼴이 재수 없었다. 중혁은 남자가 놓은 손목을 다른 손으로 감싸며 이를 빠득 갈았다.
“내가 언제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나? 간접 하지 마라. 여태껏 그래왔던 것처럼 마계로 돌아가서 네놈의 잘난 영상구로 지켜보기나 하란 말이다. 마음을 빼앗겨? 웃기지 마. 인간을 개미에 비유하지 않았나? 네놈은 그저 재밌는 장난감을 곁에 두고 가까이서 보고 싶은 것뿐이다.”
중혁은 시근덕거리며 남자를 사납게 노려봤다. 그렇지 않아도 갑자기 맡게 된 몬스터 토벌 의뢰 때문에 준비할 게 많은데, 느닷없이 나타난 남자 때문에 시간을 허비했다. 게다가 아까 전 이유를 설명해주던 남자의 얼굴은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닌 것 같았지만, 분명 설명하지 않은 이유가 더 있는 것만 같았다. 힘을 보여주고 이런 말을 하면 벌벌 떨면서 순순히 따라갈 줄 알았나 본데 큰 오해였다. 이때까지 자신을 힘으로 억누르려는 놈들은 셀 수 없이 많았다. 멍청하고 멍청한 놈들. 자결을 하는 일이 있더라도 이런 남자를 따라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가만히 있던 남자의 입술이 살짝 올라갔다. 중혁은 또다시 그가 자신의 생각을 읽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친놈, 읽지 말라는 말에 대답은 해놓고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중혁은 미간을 좁히며 뒤를 돌아 문손잡이를 잡았다. 더는 남자와 같이 있고 싶지 않았다. 손잡이를 잡은 중혁은 문을 강한 힘을 밀고 당겼지만, 문은 여전히 열리지 않았다. 어떻게든 열어보려고 했지만 미동도 하지 않는 문을 쳐다보며 중혁이 발로 문을 걷어차려던 순간 남자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알았어, 사실대로 말해줄게. 진정해.”
남자는 인상을 찌푸리는 중혁을 쳐다보다가 발걸음을 돌려 처음처럼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그리곤 자신의 옆자리를 손으로 툭툭 쳤다. 뭐 하는 짓인지 지켜보던 중혁의 미간 주름이 깊어졌다.
“그렇게 무섭게 노려보지 말고 일단 여기 앉는 게 어때? 다리 안 아파?”
“신경 쓰는 척하지 마라.”
“까칠하긴, 그럼 검이라도 가져가지? 내가 알기론 무기가 이거밖에 없을 텐데, 내일 있는 몬스터 토벌에는 뭘 들고 가려고? 나뭇가지?”
남자는 좀 전에 빼앗아간 중혁의 검을 한 손에 들고 성의 없이 허공에 휘둘렀다.
“…무기 같은 건 새로 사면 된다.”
“얼마 전에 빌린 돈 갚는다고 모은 돈 거의 다 쓰지 않았어? 그래서 이번 의뢰도 급하게 받은 거고. 포션도 새로 사고, 무기까지 새로 사면 의뢰비를 받아도 부족할 것 같은데?”
중혁은 재수 없게 웃는 남자를 보며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쪽 사정을 잘 알고 있어 더욱 짜증이 났다. 확실히 무기를 새로 산다면 의뢰비를 받아도 남는 게 없었다. 중혁은 입술을 잠시 깨물고 남자가 앉아 있는 침대를 향해 척척 걸어갔다. 남의 침대 위에서 자신의 집처럼 편안히 앉아있는 남자는 정말 재수가 없었다. 남자를 노려보며 손에 들고 있는 검을 가져가려 한 중혁은 뻗은 손을 붙잡아 끌어당기는 힘에 이끌려갔다. 눈을 깜박이자 어느새 남자와 중혁의 자리가 바뀌어 있었다. 침대에 앉은 중혁의 다리 위에 검을 내려놓은 남자는 다시금 실실 웃었다. 뭐라고 하려고 한 중혁은 그냥 이를 꽉 깨물며 입을 다물었다. 말을 하면 할수록 남자에게 말려드는 것만 같았다. 중혁은 검을 들어 남자가 무슨 장난을 치지는 않았는지 확인하고 검집에 넣었다. 이걸로 무기는 다시 회수했고…. 중혁은 고개를 들어 남자를 쳐다봤다.
“이제 그 사실이라는 걸 말해라.”
“거 참, 이렇게 명령을 듣는 게 몇백 년 만인지. 알았어, 노려보지 마. 얘기해 줄 테니까. 그러니까…. 넌 내일 죽어.”
“…장난하자는 건가?”
중혁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남자를 올려다봤지만, 남자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드러나 있지 않았다.
“아니. 마계 최고 예언자에게서 받은 예언이야. 유중혁 너는 내일 죽는다.”
“이유는?”
“생사만 알 수 있을 뿐, 자세한 건 몰라. 다만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넌 내일 확실히 죽게 될 거야.”
중혁은 가만히 남자의 눈을 쳐다봤다. 여전히 흐릿하지만 거짓은 없는 눈이었다. 죽는다. 여태껏 그런 말은 질리도록 들었다. 처음 몬스터 토벌 의뢰를 받기로 했을 때 모두가 죽을 것이라 했다. 왼팔과 오른발이 부러졌다. 그래도 살아 돌아왔다. 용병단의 들어오라는 제안을 거절했을 때도 그렇게 혼자 다니다간 죽을 거라고 했지만, 지금까지 홀로 살아남았다. 수많은 죽음 예고 속에서 중혁은 살아남았다. 그런데 이젠 마왕까지 나타나서 죽음을 말하고 있다. 어떻게 살아왔는데. 어떻게 견뎠는데. 세상이 자신의 죽음을 원하는 것만 같았다.
남자는 밀려오는 생각들을 읽으며 중혁을 내려다봤다. 되도록 모르게 하고 싶었지만 결국 사실을 알게 됐다. 그녀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울음을 터뜨릴까. 아니면 분노할까.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쉬이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나 부정한다고 없었던 일이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해도 죽음을 피해갈 수 있는 건 아니다. 인간은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
하지만 중혁은 주어진 수명에 절반도 살지 못했다. 미련이 많이 남는 것도 이해한다.
“다시 물어볼게. 나와 함께 마계로 갈래? 마법을 사용한다면 본래 수명보다 더 오래 살게 해 줄 수도 있어.”
남자는 중혁이 이번에는 거절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중혁은 이때까지 살기 위해 발버둥 쳐왔으니까, 죽는 것은 누구보다 싫을 것이다. 중혁은 검 손잡이를 손끝이 하얘지도록 꽉 붙잡았다. 남자는 천천히 중혁의 입술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아니. 나는 마계로 가지 않는다.”
단호한 거절에 남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째서? 이대로 죽고 싶어?”
“나는 죽지 않는다.”
“아니 너 내일 죽는다니까. 내 말이 못 미더워서 그래? ‘존재 맹세’를 할게.”
중혁은 고개를 살짝 저었다.
“나는 도망치지 않는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혼자 살아남을 것이다. 그러니 네 도움은 필요 없다. 돌아가서 간섭하지 말고 지켜보기만 해라.”
남자는 인상을 찌푸린 채 중혁을 내려다봤다. 내일 당장 죽는다는데 그까짓 자존심이 뭐가 중요하다고 저러는지 모르겠다. 목덜미가 팽팽히 당겨지는 느낌이었다. 인간들이 뒷목을 잡는다는 말을 이럴 때 쓰는구나. 마음 같아서는 중혁을 기절시켜서라도 마계로 데려가고 싶었다. 충분히 그럴 힘이 있음에도 남자가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나름대로 중혁을 존중하고 있는 것이었다. 중혁이 들으면 화를 낼지도 모르지만, 애초에 마족이란 그리 성격이 좋은 종족이 아니었다. 인내심도 없고. 만약 상대가 중혁이 아니었다면 남자가 이렇게 해본 적도 없는 설득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니 아예 이곳에 오지도 않았다. 새로운 인간을 찾으면 되니까.
남자는 검을 꽉 쥐고 있는 중혁의 손을 눈길 하다가 눈을 쳐다봤다. 아름다운 보석을 깎아 만든 것만 같은 까만 눈에 전구의 빛이 노랗게 일렁거렸다. 중혁의 눈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상대가 자신보다 강하다는 것을 알아도 포기하지 않는 눈. 대개 중혁이 이런 눈빛을 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기 뜻을 굽히지 않는다. 옆에서 말려줄 상대가 없어서 그런지 고집이 참 엄청났다. 한참 아무 말 없이 서로의 눈을 쳐다보던 둘의 눈싸움은 남자가 먼저 두 손을 들며 끝이 났다.
“좋아, 내가 졌어. 널 마계로 데려가는 건 포기하지.”
꽤 순순히 포기하는 남자의 태도에 중혁의 눈썹이 들썩거렸다. 억지로 데려갈 것을 대비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간단히 해결되는 건가? 중혁은 앞에 서 있는 남자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대신 나도 돌아가지 않겠어.”
“무슨 말이지?”
“돌아가지 않고 네 곁에서 도움을 주겠다는 말이야.”
중혁의 얼굴이 왈칵 구겨졌다.
“도움은 필요 없다고 했다!”
“그럼 죽는다니까.”
“내가 알아서….”
“알아서, 뭘 어떻게 하게? 의뢰를 받았으니 내일 몬스터 토벌은 반드시 하러 갈 거고. 평소보다 더 주의하면 될 거라고 생각해? 예언은 고작 행동에 주의를 기울인다고 피해지는 게 아니야. 어떤 강력한 힘의 개입이 없으면 절대 변하지 않는다고.”
중혁은 입을 달싹거리다가 다물었다. 저 남자의 도움을 받는 건 싫었다. 하지만 이대로 죽기는 더 싫었다. 남자에게 도움을 받으면서 걱정거리를 최소화하는 방법…. 중혁의 강렬한 고민을 대변하듯 눈썹이 자꾸만 꿈틀거렸다. 남자는 이러다 내일이 오겠다고 생각하면서 차분히 기다렸다.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있던 중혁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아까 말했던 ‘존재 명세’라는 건 뭐지?”
“목숨을 건 맹세인 셈이지. 맹세를 어긴다면 푸른 불꽃이 심장을 태울 거야.”
중혁은 생각에 감겼다. 저 존재 맹세라는 것을 이용한다면……, 나름 괜찮은 생각 같았다. 문제는 저 남자가 이걸 쉽게 들어주느냐인데…. 남자가 이때까지 한 행동을 보면 들어줄 것 같기도 했다. 남자는 마왕 주제에 어울리지도 않게 구원 놀이에 빠진 것인지, 자신을 살리는 것에 혈안 되어 있으니까. 중혁은 머릿속으로 할 말을 정리했다. 간단히 생각 정리를 마친 중혁이 입을 열려고 할 때 누군가 말을 가로챘다.
“호오, 내 도움을 받는 대신 존재 명세를 시키려고? 재밌네. 사실 나 이거 해보는 거 처음이거든. 누가 마왕한테 존재 맹세를 시키겠어? 넌 정말 인간이면서 겁도 없고 귀여운….”
“…그만. 내 생각을 읽지 마라. 그게 첫 번째 조건이다.”
더 이상은 못 참아주겠다. 읽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전혀 들어줄 것 같지 않으니 아예 금지를 하기로 했다. 이렇게 하면 자신의 목숨이 아깝지 않은 이상 읽지 못하겠지.
“흐음. 재밌었는데 아쉽네. 다른 조건은?”
“다음은, 도움을 주고 싶으면 내 허락을 받아. 내가 허락하지 않는 건 하면 안 된다.”
“일방적이네. 좋아, 내가 또 어디 가서 이런 악조건을 들어보겠어.”
중혁은 웃는 남자를 못마땅하게 쳐다보며 입술을 다물었다가 떼었다.
“세 번째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게 위해를 가하지 않을 것. 이게 마지막 조건이다.”
“그럼 그렇게 하기로 하고. 기간은…, 내가 정해도 괜찮지?”
“기간? 내일 하루 동안이 아닌가?”
“지금 우리는 미래를 바꾸려는 거야. 뒤따를 위험은 나도 예상 못 해. 적어도 1년, 그동안은 네 곁에 있을 거야.”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작게 미간을 좁힌 중혁은 가만히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1년 동안 나는 너의 죽음을 막으면서 네 생각을 읽지 않고, 도움을 주기 전 네 허락을 받을 것이며, 네게 위해를 가하지 않을 것을 맹세한다.”
말을 하는 중간부터 푸른 전기가 잘게 튀더니 말을 끝내자마자 남자의 몸에서 푸른 불꽃이 일었다. 중혁은 흠칫하며 몸을 살짝 뒤로 물렸다. 하지만 그 위협적인 불길은 가까이 있었음에도 뜨겁지 않았다. 크게 일렁이던 푸른 불꽃은 서서히 그의 심장 쪽으로 파고들어 사라졌다. 그가 맹세를 어긴다면 저 불꽃이 심장을 태워버릴 것이다. 중혁은 숨을 길게 내뱉었다. 눈에 잔상이 남았는지 불꽃이 자꾸 눈앞에 아른거렸다.
“이제 네 손 좀 줄래?”
남자는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이것 또한 맹세를 하는 과정 중 하나인가?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싱긋 웃었다. 중혁은 손을 천천히 앞으로 내미었다. 남자는 중혁의 손바닥 위를 가볍게 손끝으로 원을 그리는 것처럼 쓸었다. 손바닥을 간질이는 느낌에 손이 자꾸만 움찔거렸다.
중혁의 손을 얼굴 앞으로 가져다 댄 남자는 자신의 입술을 손바닥에 찍어 눌렀다. 따뜻하고 말캉한 감촉에 손끝부터 소름이 올라왔다. 심지어 촉촉하기까지 했다. 기분이 나빴다.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남자의 눈이 슬쩍 휘어졌다.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중혁의 눈이 커졌다. 중혁은 있는 힘껏 남자의 얼굴을 세게 떠밀었다. 머리털이 삐죽 서는 것 같았다,
“미친놈. 이딴 게 정말 맹세에 필요한 건가?”
중혁은 손바닥을 옷자락에 벅벅 문질러 닦았다. 축축한 혀가 손바닥을 질척하게 핥는 느낌이 너무 선명했다. 찝찝하고 불쾌한,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느낌이었다. 심장이 빠르게 요동쳤다. 미는 힘에 잠시 휘청거린 남자는 자리에 바로 섰다.
“맹세는 아까 말했을 때 끝났지. 푸른 불꽃 봤잖아?”
“그럼 손은 왜 달라고 한 건데?”
“이게 인간계의 구애 행위? 라고 하던데.”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하는 남자를 쳐다보던 중혁은 어이가 없어 잠시 넋을 놓았다.
“누가 그딴 헛소리를 했지?”
“책. 네가 도서관에 자주 가길래 나도 따라 읽어봤어.”
어떤 책인지는 몰라도 전부 찾아내서 불살라 버리고 싶었다.
“…다시는 하지 마라”
“왜?”
“불쾌하다.”
중혁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는 남자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놈이랑 1년 동안 같이 지내야 한다니…. 하루 동안 많은 일이 지나가서 정신을 못 차리겠다. 조금만 방심하면 남자에게 휩쓸려 갈 거 같았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중혁은 눈을 부릅떴다. 남자는 완고한 표정한 중혁을 보더니 영 아쉬운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았어. 그럼 이제 필요한 것들이나 사러가 볼까?”
“지금?”
“당연하지. 내일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데 당장 사야 돼. 그리고 솔직히 성에서 지켜볼 때 네 물건 다 바꿔주고 싶었어.”
씨익 웃은 남자는 손을 튕기더니 자신의 어깨에 겉옷을 걸쳤다. 외출용 옷인 듯싶었다. 허공에서 나타난 검은 겉옷은 남자의 무릎까지 올 정도로 길었다. 안에 입은 옷도 검은색인데 겉옷까지 검은색이라니. 검은색을 상당히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중혁도 검은색을 좋아했다. 하지만 왠지 저 남자에게는 검은색 보다….
“응? 왜 뚫어지게 봐? 마법이 신기해?”
“흰색이 더 어울릴 것 같군.”
중혁은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속으로만 생각한다는 게 갑자기 말을 걸어와서 입 밖으로 내 버렸다. 남자는 눈을 깜박이다가 자신의 옷을 내려다봤다. 그리곤 다시 고개를 들어 중혁을 쳐다봤는데 입매가 꿈틀거리는 걸 보니 기분이 썩 좋은 모양이었다. 옷을 지적받았는데 기분이 좋다니 정말 모를 놈이었다.
“흰색이 더 낫다고? 그런 말 처음 듣는다.”
“…얼굴이 허여멀건 해서 그렇게 생각한 것뿐이다.”
뭐라 말하든 남자는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넌 정말 특이한 인간이야. 좋아, 첫 번째 선물은 이걸로 하지. 받아 줄래?”
남자는 자신의 겉옷을 벗어 중혁에게 내밀었다. 미간을 찌푸린 중혁은 남자가 들고 있는 옷을 눈으로 살폈다. 옷은 활동하는데 불편하지 않고 모양까지 신경 쓴 것 같았다. 까다로운 중혁의 눈에 들 정도인 걸 보면 실력이 좋은 자가 만든 것 같았다. 마왕이라 옷도 참 좋은 걸 입는 듯했다. 중혁은 머뭇거리다가 옷을 받아들었다. 옷에 팔을 꿰어 넣자 길이 조금 긴 듯 소매가 손등을 살짝 덮고 종아리까지 내려왔다. 그러나 금세 길이가 알맞게 줄어들었다.
“잘 어울리네.”
생긋 웃은 남자는 다시 자신의 손을 튕겼다. 그러자 이번에는 허공에서 내려온 흰옷이 남자의 어깨 위로 걸쳐졌다. 중혁은 칭찬을 기대하듯이 쳐다보는 남자의 눈에 눈살을 찌푸리며 작게 말했다.
“아까 보다는 낫군.”
남자는 만족한 듯 짙은 미소를 흘렸다. 여전히 재수가 없는 미소였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물건들을 사러….”
“그런데.”
“응?”
“네 이름은 뭐지?”
이름? 남자는 고민하는 듯 침음했다. 어려운 것을 물은 것도 아니고, 앞으로 같이 다니며 부를 이름을 물은 것뿐인데 이렇게까지 고민할 필요가 있나? 눈썹을 꿈틀거리며 계속해서 고민하던 남자는 아, 하는 소리를 내더니 자신 있게 말했다.
“김독자.”
“무척, …인간 같은 이름이군.”
“원래 이름은 더 긴데 줄여봤어. 어때, 괜찮아?”
“…그래.”
모습에 맞지 않게 촌스러운 이름이라는 말은 속으로 삼켰다. 본인은 그 이름이 매우 만족스러운 것 같았다.
“자, 자, 얼른 가자. 인간들은 어두워지면 일을 하지 않잖아.”
중혁은 재촉하는 독자를 쳐다보며 침대에서 일어나 천천히 문을 향해 걸어갔다. 문은 조금 전까지 열리지 않은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간단히 열렸다.
“무기부터 보러 갈까? 옷도 좀 심각하지. 포션도 사야 하고. 너 아까 보니까 손등이 까칠하더라, 보습제도 사야겠다. 내가 쓰는 게 있는데 그거 줄까? 효과가 꽤 괜찮아. 그래도 역시 무기부터 보는 게 좋으려나…….”
중혁은 옆에서 계속 조잘거리는 독자를 보며 벌써 앞으로 생활이 걱정됐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마왕과 인간의 동거는 이미 시작되었다.
손바닥 키스
구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