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랏다
왜 하필
* 45번 시나리오 이후 시간대/ 1863회차 얘기를 46번 시나리오 이전에 미리 한다는 설정(원작과 다름)
어디서부터 놓쳤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하여튼 아주 갑작스럽고 희한한 짓을 유중혁이 저질렀다. 단시간에 벌어진 일이라고 해도, 전조도 없이 일어난 그것에 대해 김독자가 느낀 당혹을 포함한 여러 감정은 아직까지도 신경이 쓰일 정도로 강렬했다. 지난 3년간 대체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유중혁이 그런..... 그 원인을 규명하기 어려운 짓을 하게 될 만한 특정한 무언가가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마치 무슨 보고서에라도 쓰일 법한 말투로 급하게 머릿속의 문장들을 끝마친 김독자는 애써 자신을 납득시켰다. 겉으로는 평소와 다름없이 또 무슨 계획을 궁리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 이현성과 정희원을 포함한 대다수의 복잡한 눈빛을 받고 있던 김독자의 뇌리에서는 또다시 엊그제의 일이 재생되었다.
45번 시나리오가 끝나고, ‘못 생긴 오징어’는 ‘구원의 마왕’으로 되돌아왔다.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으로 이어질 뻔했던 재회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뒤이은 짧은 감금에서 벗어나서야 김독자는 일행들과 자세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3년이라는 짧고도 긴 시간이 김독자를 제외한 일행들이 이미 흘려보낸 시간이었다.
그동안 일어났던 대부분의 일들은 그의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김독자가 조금 확신하지 못했던 것과 다르게, 함께하지 못했던 시간 속에서도 그들은 김독자를 잊지 않았다. 각자의 방식으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지혜나 이길영은 그렇다 쳐도, 다짜고짜 부딪쳐 오는 유중혁의 칼날을 생각하면 여전히 간담이 서늘하지만 그 행동의 이유를 생각하자면 내심 웃음이 나온다. 확실히 3년 안에 얻을 수 있는 성취라 하기에는 어마어마했지. 앞으로 치르게 될 올림포스와의 싸움을 생각하면 조금은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은 더 많은 것을 준비해야 하겠지만.
그렇게 다음 시나리오를 들어가기 전, 일주일 남짓한 빈 시간 동안 그들은 개인 의사에 따라 충전 및 수련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더 오랜 시간을 버티고 있기에는 유상아의 상태가 심각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한수영과 1863회차의 그녀에 대한 얘기를 더 나누고 난 뒤, 김독자가 자신의 화신, 신유승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돌아온 뒤로 유승이를 더 신경써줘야겠다 라는 마음이 커졌기에 직접 가서 대화도 좀 나누고 그럴 참이었다. 김독자의 머리 속에는 신유승에게 도움이 될 법한 시나리오나 아이템들, 혹은 신유승과의 대화주제 밖에 없었다. 그랬기에 몰랐다. 아니, 사실은 그 어떤 생각을 하고 있더라도, 심지어 생각 따위를 안 하고 있었더라도 이를 알 수는 없었을 것이다. 유중혁의 그 행동을.
먼 복도 끝에서 모습을 드러낸 유중혁은 갑자기 빠른 속도로 저벅저벅 걸어오더니 정면으로 김독자를 마주하고 섰다. 둘 사이의 간격은 아슬아슬 하다고 하기에는 조금 멀었지만 단지 대화를 한다기엔 너무 가까웠다. 당황스런 김독자의 기색은 안중에도 없는 듯 유중혁이 비웃듯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리고 찰나의 순간, 유중혁은 번개같은 속도로 다가와 김독자의 코끝을 물었다. 이빨로 무는 힘이 너무 세서 단순히 ‘물렸다’라기보다는 거의 유중혁의 입 안에서 코가 씹히고 있다고 하는 게 무방할 정도였다. 하필 무는 곳도 코라서, 아픈 것보다 어이가 없어서 넋을 놓고 있던 김독자는 아무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아니 저 쪽 유중혁은 흙을 먹더니, 이 쪽 유중혁은 못 본 사이에 웬 개새끼가 된 건지 뭔지 혼란스러웠다. 짧고 강하게 딱 두 번 김독자의 코를 꽉 물고 떨어진 유중혁은 코에 남은 이빨 자국을 보고 만족스런 미소를 지은 채, 곧장 뒤돌아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김독자는 두 배로 어이가 없어졌다. 되돌아간다는 건, 지금 유중혁이 무슨 자기 코 하나를 너덜하게 만들어 놓겠다는 사소한 목적으로 김독자를 친히 찾아왔다 갔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지은 그 열 받는 미소를 보면 절대로 가던 길을 까먹어서 따위의 유중혁답지 않은 이유는 아니다. 전자의 이유가 유중혁답다고도 할 수 없지만...
그렇지만 김독자가 가장 마음에 안 드는 점은 그딴 배려 없는 야생적인 접촉에도 스스로가 내심 두근거려 했다는 것이다. 하다못해 정말 제대로 된 스킨쉽이라도 했다면 모를까, 상대가 그 유중혁이라는 이유만으로 코가 씹어삼켜지는 것에 심장이 미친듯이 쿵쾅댔다는 건 김독자가 생각해도 좀 자존심이 상했다. 얼굴에 홍조가 잘 들지 않는 체질이라는 게 오늘만큼 감사했던 적이 없다. 어차피 세계선을 넘기 전에 이미 자각했었던 자신의 마음은 그 누구에게도 알릴 계획이 없었고, 혼자 조용히 파묻다 보면 그것도 언젠가는 사라지지 않겠냐며 그리 심각하게 여기진 않았다. 유중혁이야 항상 자신에게 특별했으니 그랬는데 돌아오자마자 유중혁의 장난질 같은 행위에 이렇게 혼란스러워 하게 될 줄이야.
...설마 유중혁이 내 감정을 눈치챈 건 아니겠지? 알고 저러는 건가? 아니, 안다고 해도 대체 왜 코를 물어뜯는데? 접으란건가? 이 정도로 끝날리가 없는데 그러면? 그럼 마지막에 왜 웃었지? 비웃음? 아냐, 유중혁이 생략을 좀 많이 하고 행동하는 편이기는 하지만 이건 생략 정도가 아니잖아? 뭐지? 수많은 물음표 속에서도 김독자는 이거다 싶은 정답을 찾아내지 못했다. 하필 코라는 애매한 곳에 의문의 씹힘을 당했다는 어정쩡한 상황이 김독자에게 이도저도 아닌 결론을 내리게 만들었다. 그냥 뭔진 몰라도 원인이 있긴 하겠지, 라고. 사실상 일시적인 회피였다.
주변의 시선을 뒤로한 채, 김독자는 곧 유상아의 병실에서 그녀와 이지혜를 만났다. 아무래도 회사에서부터 알던 사이라 그런지 유상아 답을 얻게 된 것은 중구난방으로 이어지던 대화 중에 김남운의 휴대폰에서 발견된 하나의 스크린 샷 때문이었다.
“와, 이거 완전 추억이다... 예전에 페북에서 한참 돌았던 건데.”
“아 정말이네. 나도 몇 번 봤던 것 같아.”
이지혜와 유상아가 주거니 받거니 나누는 얘기를 들어보니 각 부위 별로 입을 맞출 때의 의미가 다르다는 내용이었다. 한참 전부터 여러 sns에 떠돌아다녔던 정보라 웬만한 사람들은 모르기 어렵다고 했다. 김독자는 반신반의하면서 코에 하는 키스의 의미를 물어봤고, 그 답을 들은 직후 더 혼란스러워 졌다. 다른 뜻이 아닌가 하면서도 걸리는 것이 그것밖에 없었다. 유중혁학 제 1 권위자인 김독자의 감에 따르면 그게 답이 맞았다.
폭풍이 몰아치는 머릿속을 잠재운 건 이어지는 대화속의 유중혁이었다. 그가 없는 3년간, 이지혜가 돌아버렸다고 할 정도로 유중혁은 비인간적인 일정들을 돌파해 나갔다고 했다. 전에도 그랬지만 그보다도 더 강해지는 것에 목숨을 걸고 돌아다닌다는 것이었다. 그 밖에도 여러가지 피비린내 나는 유중혁의 과거사를 얘기하던 유상아와 이지혜는 그들이 그랬듯이 유중혁 또한 그만의 방식으로 김독자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고 말했다. 바로 며칠 전에 ‘한낮의 밀회’가 계속 사용되던 것이 퍼뜩 떠올랐다. 내용은 아직 읽지는 않았지만, 만약 그 뜻이 맞다면 유중혁이 어떤 마음으로 지금껏 꾸준히 써왔을지 이제는 짐작이 갔다. 그러고 보니 그렇다. 김독자에게 유중혁이 그렇게 특별한 존재인데, 여러 설화를 겪어왔는데 그 유중혁에게도 김독자가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그 특별함의 종류마저 같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확실시 된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김독자는 직감했다. 밀려있던 한낮의 밀회를 전부 읽고 나서 그는 방을 나섰다. 유중혁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결심했다. 자신의 감이 틀리던 아니던, 더 이상 자신의 마음을 감추지 않기로.
결국 어떻게든,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던 거다. 김독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박력이 과했던 행위였지만 그 부위를 생각한다면 꼭 그렇지만도 아니었다. 김독자의 성격상 몇십년이 지나더라도 절대 먼저 유중혁에게 그런 감정을 내보이진 않았을거란 사실을 스스로도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그 방식에 대고 굳이 뭐라고 할 마음은 없다. 그 때 별 생각을 다한 걸 떠올리면 등짝이라도 한 대 때려주고 싶긴 하지만.
곧 김독자는 유중혁과 마주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검은 빛의 [무한 차원의 아공간 코트]를 입고 있는 유중혁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죄다 어두운 색이었다. 실용성 탓인지 기호에 의한 선택인건지는 멸살법에서도 딱히 명시되진 않았었지. 자신의 것과 빛깔만 다른 그 코트의 깃을 바라보며 김독자가 말문을 열었다.
“...그렇게 답답했냐?”
“그래도 눈치라는 게 아주 죽지는 않았나보군, 김독자.”
유중혁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사실 네가 뭐라도 하던 딱히 잃을 건 없다. 애초에 자각한 지는 1년이 조금 넘었을 뿐이라 생각만큼 깊은 감정은 아닐테니까.”
김독자는 생각했다. 유중혁은 1년 쯤 이어진 마음 정도는 그리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지만, 보통 모습이 보이지도 않고 하물며 생사조차도 불분명한 사람을 1년 동안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런 유중혁이라서 그의 기준에서 ‘깊이’ 사랑했던 사람이 있었던 저번 회차에 그렇게 절망했고, 지금 그 자신의 감정을 과소평가할 수밖에 없는 것이리라.
“...하지만 어차피 내 감정은 말하지 않더라도 그 스킬로 인해 다 밝혀졌겠지. 그럴 바에야 차라리 내가 직접 알리는 게 낫다. 그래서 했다.”
“참 깔끔하게도 얘기한다.”
유중혁이 당장 마음을 알리려고 했던 또 다른 이유는 이것과 관련되었다. 얕다고 생각했기에 앞으로의 관계를 어떻게든 정립할 수 있도록 김독자의 생각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빨리 마음을 접던, 더 키워 나가던. 이미 결정을 내린 김독자의 대꾸는 능청스러웠다.
“어차피 할 거였으면 차라리 키스를 하지, 왜 사람 코를 물어 뜯냐? 뽀뽀도 아니고. 그것 때문에 한참 헤맸잖아.”
“말했다시피 그렇게 깊은 감정은 아니다. 그 부위를 선택한 건 다른 이유도 있지만.”
슬쩍 굳어있던 어깨에 힘을 빼면서 유중혁이 꿋꿋이 주장했다. 경험이 적은 것도 아닐 텐데 저렇게 뻗대는 이유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유중혁이 그렇다니 뭐, 할 수 없지. 나중에 기회 보고 첫 키스는 자신이 먼저 해버릴 심산이다.
“그러면 만약 네가 날 더 깊이 사랑했다면? 어쩌려고 했는데?”
“.....그랬다면 그 정도로 끝내진 않았겠지.”
얼핏 형형해 보이는 눈빛을 한 유중혁이 입매를 올렸다. 사랑이란 말에 어떤 부정적인 반응도 보이지 않은 채로. 김독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드는 생각이라고는... 두 발짝 정도 성큼 걸어가 유중혁의 코앞에 선 김독자는 바로 눈에 보이는 반듯한 코를 잘근 물었다. 입을 맞추는 것도 아닌데, 어쩐지 둘 다 눈은 반 쯤 감긴 채였다. 이전 일을 되돌려 주듯 비슷한 방식이지만 좀 더 부드럽게 몇 번 이로 살짝 눌러대던 김독자가 이내 짧게 입술을 꾹 누른 뒤, 고개를 뒤로 했다. 성인 남성끼리 하는 스킨쉽 치고는 상당히 풋풋했지만 둘을 둘러싼 분위기는 다소 진득했다.
‘당신에게 반했습니다’같은 말을 은근히 돌려서 전하는 건 유중혁과 끔찍하게 어울리지 않는 짓이었으니, 하고많은 부위 중에 코를 그렇게 물어뜯었던 것은 마지막 남은 유중혁의 심술이 아니었을까. 한번 지 알아서 잘 생각해보라는 식으로. 바로 떠먹여주진 않겠다는 그의 의지가 선연하게 드러났다. 어찌어찌 생각지 못한 곳에서 힌트를 받아 해결했지만 역시 당하는 입장에서는 열 받친다. 사람 헷갈리게 하고 말이야. 먼저 나서준 건 고맙다고 해도.
그렇게 뻔뻔한 척 하던 유중혁의 귓바퀴는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저번보다 그가 자신에게 했던 것보다 더 오래, 부드럽게 진행된 접촉이라 그런지 김독자가 했던 반응보다 눈에 띄었다. 그냥 유중혁이 예민한 편이라 그럴지도 모르고. 시간이 지나면 차차 알게 될 것이다.
앞으로도 우리들은 이 지옥같은 시나리오를 깨부숴가며 나아갈 것이다. 그 누구도 확실히 도달하지 못한 ■■에 닿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지금 이 순간부터 유중혁과의 관계에 다른 의미가 섞이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끝까지 함께. 짙은 눈으로 눈앞의 유중혁을 끌어안으며 김독자가 작게 웃었다.
코 키스
'당신에게 반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