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
지나간 계절
너 그때 왜 나한테 키스했어?
불을 뺀 철판 위로 마지막 남은 고깃덩어리가 자글자글 타들어 간다. 김독자의 얼굴은 첫 잔을 나눴을 때부터 벌겋게 익어 있었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 유중혁은 몇 번인가 상추를 집어 들었는데, 큼지막한 고기 몇 점에 구운 마늘이나 매운 고추 따위가 들어간 쌈은 번번이 김독자의 입으로 들어갔다. 그러면 김독자는 하려던 말을 잊고 미어터진 볼을 우물댔다. 유중혁은 깨끗한 자신의 앞접시와 흉하게 헤집어진 계란찜과 반쯤 비운 술병과 시원찮게 끔뻑거리는 김독자의 눈꺼풀을 바라봤다. 더는 고기나 먹으라며 내밀 핑곗거리가 없었다.
“그것만 마시고 일어나지.”
그래서 유중혁은 김독자의 빈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투명한 액체가 표면을 넘길 듯 말 듯 했다. 그러면 김독자는 그것을 흘리지 않기 위해 애쓰느라 또다시 말이 없었다.
“안주해야지. 안주….”
“탔다. 먹지 마.”
“배 터질 것 같아.”
“그러니까 먹지 마라.”
“그런데 왜 아까부터 나만 먹이냐?”
“…일어날까.”
“너 그때 왜 나한테 키스했어?”
“취했다, 김독자.”
“네가 계속 줬잖아.”
“앞으로는 넙죽넙죽 받아먹지 말고.”
유중혁은 새카맣게 타버린 고기를 눈앞에서 치워버렸다. 짝이 맞지 않는 젓가락이 아쉬운 듯 허공을 까닥인다. 대신해서 물을 내밀었더니 또 넙죽 받아마신다. 유중혁은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빈 의자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던 가방을 드니 무게가 가벼웠다.
“짐은 이것뿐인가? 든 게 없군.”
“지갑만 있으면 되지, 뭘.”
말하며 김독자는 제 뒷주머니를 툭툭 두드렸다.
“집에 어떻게 가지?”
“데려다주겠다.”
“너 우리 집 어딘지 알아?”
“이사했나?”
“아니.”
“그러면 기억하고 있다.”
응, 그렇구나. 김독자는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리며 웅얼댔다. 잔뜩 피곤한 모양새였다. 유중혁은 그의 팔을 잡아 어깨에 둘렀다. 정신없이 엉겨오는 몸이 무거웠다. 뺨을 툭툭 건드리자 김독자는 느리게 눈을 떴다. 그리고는 자기 발끝을 노려보다가 다시금 눈꺼풀을 내렸다. 김독자. 유중혁이 나지막하게 이름을 불렀다. 응. 내쉬는 숨에서 술 냄새가 잔뜩 났다. 일어나라. 알았어. 김독자. 응. 일어나. 알았어. 김독자. 일어났어.
“그때 자는 척하고 있었나.”
“응….”
“왜 연락하지 않았지.”
“네가 왜 키스…했는지 안 알려줬잖아.”
“스스로 걸어라. 많이 힘든가?”
“야, 나. 갈 수 있어.”
“미안하군. 많이 먹여서.”
“배 터질 거 같아.”
“김독자.”
“일어났다니까.”
“손등에 하는 키스는.”
문에 달린 풍경이 달랑거렸다. 눈꺼풀이 잘 들어 올려지지 않았으므로 김독자는 눈을 감고 있었다. 자신이 제대로 걷고 있는 건지 아니면 이끄는 대로 질질 끌리고 있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이르게 깨어난 매미가 길게 운다. 나무 바로 아래를 지나자 매미 소리에 귀청이 따가울 정도였다. 맴, 맴, 요란한 울음 사이로 유중혁이 몇 마디를 중얼거렸다.
초여름 밤의 선선한 바람이 뺨을 간지럽혔다. 근처에 꽃나무가 있는지 향기가 실려 있었다. 자동차 배기관이 낮게 울리며 지나쳐갔다. 자욱한 먼지가 안면에 달라붙는 것 같았다. 왁자하게 지나치는 사람들은 즐거운 모양이다. 고기든 술이든 지나치게 많이 먹어서 걸음마다 속이 울렁거린다. 턱을 간질이는 옷깃에 고기 냄새가 뱄다. 하수구에서 올라오는 역한 비린내와 싱그러운 꽃향기가 뒤섞여서 비위가 상했다. 욱. 손아귀로 입가를 감춰 살내음을 들이키며 김독자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구나.”
지나간 계절을 추억하는 건 그렇게나 의미가 없다. 뒤로 감은 카세트를 몇 번이고 재생해도 내용이 달라지지 않는 것처럼.
◀◀
그해 여름에는 하수구 냄새가 유독 짙게 올라왔다. 그늘 없이 이어진 아스팔트는 신발 밑창을 녹여버릴 기세였고 내리쬐는 직사광선에 눈이 부셨다. 지나가는 차를 피해서 잠시 멈춰선다는 것이 그만 기운이 빠져, 김독자는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낮아진 시선으로 바라보면 여느 여름날처럼 지면이 일렁거린다.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에서 썩은 내가 났다.
김독자는 무릎 사이에 고개를 처박고 입을 벌려 숨을 몰아쉬었다. 잠시만, 잠시만 쉬었다 가자. 햇빛이 목덜미를 따갑게 찌른다. 흐르는 땀으로도 식혀지지 않는 열이 지독했다. 눈을 감으면 잠이라도 들 것 같아 갈라진 땅바닥을 바라봤다. 그림자가 졌다.
얼굴은 역광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대강 또래이거나 한두 살쯤 더 많아 보였는데 키는 멀끔하게 컸고 교복은 입고 있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쭉 같은 동네에서 살아온 김독자의 기억에도 없는 얼굴이었다. 소년은 김독자를 멀거니 바라보다 손목에 걸쳐있던 비닐봉지 속을 뒤적였다. 어깨를 들썩일 정도로 차가운 무언가가 광대뼈를 꾹 눌렀다. 뺨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김독자는 엉겁결에 그것을 쥐었다. 생수였다. 소년은 작게 고개를 까닥이고는 등을 돌렸다. 반듯한 어깨와 까만 뒤통수가 눈에 띄었다. 김독자는 그가 오르막길을 걷는 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다음날 김독자는 생수 하나를 든 채 발끝의 돌멩이를 툭툭 건드렸다. 부러 냉장고 안쪽에 들어있던 것을 골라온 덕분인지 물병은 아주 차가웠다. 이날 아침은 평소보다 선선한 듯도 했다. 선선하다고 해야 할까. 건물 사이로 드는 바람이… 상쾌하게 느껴졌다. 문득 향긋한 샴푸 향이 바람에 스며있다는 생각이 미치자 낯익은 실루엣이 드러났다.
반듯한 어깨에 가방이 걸쳐있다. 교복은 새것이었고 살짝 덜 마른 머리카락이 구불구불했다. 눈이 마주쳤다. 김독자는 딸꾹질을 삼킨 것처럼 몸을 굳혔다. 가만 보고만 있자 소년은 가볍게 김독자를 흘기고는 지나쳐갔다. 얼핏 보니 명찰이 녹색이었다. 김독자는 제 가슴께에 달린 명찰을 만지작거리며 그를 뒤따랐다.
“안녕.”
“뭐냐.”
“너 이사 왔지?”
학기가 시작한 지 몇 달이나 지났는데 모르는 얼굴이 있을 리 없었다. 물론 김독자가 같은 학년의 모든 학생을 꿰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동네 또래라면 뻔했다.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김독자는 들고 있던 물병을 흔들며 조잘댔다.
“이거 받아.”
“됐다. 신경 쓰지 마라.”
어제 일을 기억하는 반응에 괜스레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소년은 걸음이 빠른 편이었고, 짤막한 대답을 끝으로 더는 김독자와 대화를 이어갈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단숨에 앞질러 가는 뒷모습에 김독자는 급히 발을 놀렸다. 내리막길에 속도를 이기지 못한 몸이 불안하게 휘청였다. 셔츠 깃을 낚아채였다. 넘어지는 신세는 면했지만, 목이 눌려 꼴사납게도 캑캑거리고 말았다. 소년은 혀를 차며 그를 놓아주었다. 그리고는 잠깐 걸음을 멈춘 사이에 또 저만치 멀어져가는 것이다.
“너 걸음 진짜 빠르다.”
“…….”
이제 대꾸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김독자는 눈동자를 굴리며 말을 골랐다. 자신에게 이만한 친화력이 –어쩌면 뻔뻔함인지도 모른다.- 있는 줄은 몰랐던 터라 내심 놀란 참이었다.
“가는 길 알아?”
“저번에 가봐서 안다.”
“그쪽 아닌데.”
걸음이 우뚝 멈췄다.
“내가 지름길 알려줄게. 같이 가자.”
소년은 김독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다시금 움직였다. 확답은 없었지만 걸음은 확연히 느려져 있었다. 김독자는 입꼬리를 올리며 그의 옆에 나란히 섰다. 얼핏 봤던 명찰을 다시 들여다보니 노란 자수로 한자가 새겨져 있었다. 김독자는 그것을 더듬더듬 읽어 보았다.
“유, 중. 이거 어떻게 읽어?”
“혁.”
“유중혁. 와 너는 이름도 잘생겼다.”
마주친 눈이 의아한 낌새를 담고 있었다. 못마땅한 것 같기도 했다. 김독자는 한 박자 느리게 자신이 입 밖으로 낸 말을 깨달았다. 단번에 두 뺨이 발갛게 물들었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라.” 유중혁은 덩달아 귀 끝을 붉히며 투덜댔다.
“뭐냐.”
“같이 가기로 했잖아.”
“그거 말고. …이름.”
“김독자.”
그 뒤로 김독자는 매일 유중혁을 기다렸다. 처음에는 그들이 마주친 슈퍼마켓 근처였다. 한 주정도 지나자 김독자는 오르막길을 조금 더 올랐다. 그렇게 매일 조금 더, 조금 더 하다가 한 달이 될 즈음에는 유중혁의 집 앞에서 기다리게 되었다. 그러면 유중혁은 왜 여기까지 올라오냐고 물었고 김독자는 지나가는 길이라고 답했다. 뻔한 거짓말이었다. 유중혁의 집은 제일 꼭대기에 있었다.
언제부터는 유중혁도 김독자를 기다렸다. 김독자의 반은 종례가 늦었다. 처음에 유중혁은 교문 앞에 서 있었다. 지나치는 학생들이 모두 그를 흘끔거린 탓에 다음부터는 김독자가 나오는 건물 출구에서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다음날, 역시 만만찮은 시선에 그냥 김독자의 반을 물어보기로 한다.
뒷문을 나서자 마주친 인물에 김독자는 씨익 웃었다.
“같이 갈 친구도 없냐.”
방학을 앞둔 여름이 완전히 무르익었다. 올려다보면 그늘 없이 이어진 오르막길이 아찔했다. 단단히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슈퍼마켓에 들른 김독자의 손에는 아이스크림이 들려있었다. 반으로 가른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내밀자 유중혁은 멀뚱히 그것을 바라봤다.
“단것 안 먹는다.”
“…먹으라고 주는 거 아니거든. 들어달라고.”
강제로 쥐여준 셈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유중혁은 선뜻 그것을 받아들었다. 김독자는 제 손에 든 것을 보라는 듯 크게 베어 물었다.
“김독자.”
유중혁이 그를 불렀을 때는 오르막길을 반 정도 오르던 참이었다. 헉헉대며 옆을 돌아본 김독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마터면 물고 있던 아이스크림을 떨어트릴 뻔했다. 녹아내린 아이스크림이 뚝 떨어져 유중혁의 엄지 위로 흘렀다.
“빨리 먹고 가져가라.”
“중혁아, 너 국어 점수 별로 안 좋지?”
“갑자기 그게 무슨 상관이지.”
“그냥 먹으면 안 되냐. 다음엔 네가 좋아하는 맛으로 사줄게.”
유중혁은 주룩 미끄러지는 표면을 멀뚱히 쳐다봤다. 답답이. 김독자는 그의 손을 잡아당겼다. 입안 가득 담긴 아이스크림 시원하다 못해 차갑다. 관자놀이가 찡, 하고 울렸다. 한쪽 눈을 찡그린 채 유중혁을 향했지만, 역광인 탓에 잘 보이지 않았다. 녹아내리던 끝머리는 이내 유중혁의 입속으로 사라졌다. 잠깐 잡아 쥔 엄지에서 묻어왔을까. 끈적거리는 손끝에서 초콜릿 향이 났다. 무척 더운 계절이었다.
▶▶
아마 햇빛이 강했기 때문일 거다.
차창에 반사된 빛에 눈을 찡그렸다가 뜨자 시야 가운데에 그가 있었다. 주변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쯤은 크기 때문일까, 어쩌면 수려한 외모 덕분일지도 모르고, 아니면 단지 낯익은 얼굴이라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김독자는 아마 저물어가는 햇빛이 강했기 때문일 거라고 확신했다. 이름은 단번에 기억나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가슴 한쪽에 명찰 따위가 달려 있지도 않았다. 아는 척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파란 불이 켜졌다.
그는 김독자를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어차피 봐도 알아차리지 못하겠지 싶은 생각도 들었다.
“김독자.”
사람들 사이로 시선이 엇갈린다. 목소리를 듣자 당연한 수순처럼 이름이 떠올랐다. 김독자는 숨을 뱉듯 그의 이름을 발음했다. 뜨거운 아스팔트에 구두 밑창이 녹아 달라 붙어버린 건지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유중혁.”
유중혁은 김독자의 팔을 잡아끌어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갔다.
“오랜만이군.”
“와. 나 기억하네?”
“…너도.”
“너는 달라진 게 없다. 키도 자라고 그러긴 했는데 예전이랑 똑같아.”
이을 말이 떠오르지 않아 김독자는 입을 다물었다. 여전히 붙잡힌 팔을 바라볼 뿐이었다. 시선을 눈치챈 유중혁이 팔을 거뒀다.
“이 근처에서 지내는 건가?”
“회사가 이쪽이라서. 넌?”
“볼일이 있어서 잠시 들렀다.”
대화는 드문드문 끊겼고 드문드문 이어졌다. 어떻게 지냈느냐느니, 무슨 일을 하고 있냐느니…. 내내 연락이 없다가 우연히 만난 동창들이 으레 할 법한 주제들이었다. 이윽고 긴 침묵이 찾아들자, 김독자는 휴대전화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계속해서 길 한가운데에서 대화할 수는 없었다. 김독자는 손을 내밀었다. 만나서 반가웠다.
“나중에 밥이라도 먹자.”
허울뿐인 인사치레임을 그도 알고 있었다. 구체적인 약속을 잡기는커녕 연락처도 교환하지 않았으니까.
악수하려 내민 손이 무색하게도 유중혁은 그것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는 학창시절에 자주 그랬듯이 입을 꾹 다물고서 김독자를 보았다. 그때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알아차릴 수 있었는데. 김독자가 민망한 오른손을 거두려는 순간 유중혁이 입을 열었다.
“나중에 말고.”
지금 먹자고. 그 말에 김독자는 익숙한 기시감을 느꼈다. 유중혁은 정말 변함없었다.
◀◀
그 말이 나왔을 때는 이미 늦은 오후였다. 대화 흐름은 명확하지 않았다. 늘 그렇듯 시시콜콜한 잡담이 꼬리를 물던 참이었다. 주로 말을 하는 쪽은 김독자였고 유중혁은 고개를 끄덕이거나 간간이 추임새를 넣었다. …래서 걔네 아이스링크 다녀왔다더라. 우리도 다음에 가볼까? 김독자는 계산한 캔 커피를 건네며 말했다. 그것을 받아든 유중혁은 고리에 손가락을 걸었다.
“나중에 말고 지금 가지.”
그리고는 가볍게 뚜껑을 다 도로 내미는 것이다. 방금 유중혁이 내뱉은 말과 열린 캔 뚜껑 둘 다, 단번에 이해되지 않아 김독자는 잠시 말이 없었다.
“열어달라는 거 아니었나.”
“손 시릴까봐 준 건데.”
지난주에 비가 온 이후로 날이 급격히 쌀쌀해졌다. 입에서 하얀 김이 터져 나왔다. 커피는 방금 온장고에서 꺼내 따뜻했다. 유중혁은 짙은 눈썹을 위로 띄웠다. 김독자는 작게 웃었다. 그는 열린 캔 커피를 받아들고 자신이 본래 쥐고 있던 것을 유중혁에게 넘겼다.
“어차피 맛없다고 안 마실 거잖아.”
유중혁은 대답 대신 따뜻한 원통형의 물체를 손아귀에 굴렸다. 두 가지 의문 중 하나는 해결이 됐다. 김독자는 커피를 마시며 자신이 들은 말을 마저 곱씹었다. ‘나중에 말고 지금 가지.’ 커피는 생각보다 미지근했다. 김독자는 그새 텁텁해진 입맛을 다셨다. 스치듯 하던 이야기를 다시금 이어간다.
“어디를 가? 아이스링크?”
유중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하교 중이었고 늘 그렇듯 높다란 오르막을 오르려던 참이었다. 김독자는 가장 가까운 아이스링크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알지 못했다. 폐장 시간은 말할 것도 없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무덤덤한 얼굴을 보면 유중혁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지금 바로는 좀 갑작스럽지 않냐?”
김독자는 내용물을 쏟지 않도록 조심스레 걸음을 내디뎠다. 살얼음이 낀 오르막길은 충분히 미끄러웠기 때문에 멀리 갈 거 없이 여기서 스케이트를 타도 되겠다는, 시답잖은 농담도 같이.
“다음에 가자. 다음에.”
다음날이라는 뜻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김독자는 길게 하품하며 유중혁이 집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비켜섰다. 중혁아, 지금이 몇 시인 줄 알아? 묻자 유중혁은 휴대전화를 꺼내 답했다. 열 시 십이 분, 여태 자고 있었나? 말하는 어투에 한심하다는 기색이 가득하다. 새벽까지 그와 함께 게임을 한 김독자로서는 도리어 유중혁을 이해할 수 없었다. 김독자는 슬쩍 침대 위로 엉덩이를 대며 말했다.
“나 일단 조금만 더 잘 테니까 TV라도 보고 있을래?”
욕실에 밀어 넣어졌다.
정기휴무
빨간 페인트로 쓰인 팻말이 그들을 맞이했다. 한 글자씩 또박또박 발음하며 김독자는 유중혁을 바라봤다. 시선이 닿자 유중혁이 코트 주머니에 든 손을 움찔댔다. 바람이 불었지만, 낙엽 하나 구르지 않았다. 주변에 있는 거라고는 문을 닫은 건물, 한적한 도로, 앙상한 나무와 텅 빈 길목뿐이었다.
“미안하군.”
그래. 오전부터 집에 쳐들어 와 깨운 건 미안하다고 치자. 시간을 들여 헛걸음한 것도 그럴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김독자는 단지 스케이트를 타지 못했다는 이유로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다. 유중혁은 콘크리트 조각을 툭 찼다. 답지 않게 의기소침한 꼴이다. 이토록 아쉬워할 일인가? 그건 진귀하다면 진귀한 모습이었는데 이상하게 놀리고 싶은 기분은 들지 않았다. 김독자는 팔을 들어 그에게 척 어깨동무를 걸었다. 실패했다. 손가락이 닿자 유중혁이 과장되게 옆을 돌아본 탓이었다. 애초에 키 차이부터가 아주 조금, 조금 애매하기는 했다.
“어… 어느 손으로 찍었게.”
“시답잖은 짓 하지 마라.”
유중혁은 제 목덜미를 움켜쥐어 차가운 손끝이 스친 자리를 매만졌다. 허공에 흔들어 보이는 손은 장갑도 끼지 않았다. 유중혁은 종종 그에게 걸으면서 화면 보지 말라는 잔소리를 해야 했는데, 굳이 사용하지 않을 때도 김독자는 휴대전화를 손에 꼭 쥐고 다녔다. 찬 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것 같았다. 유중혁은 혀를 찼다. 그리고는 코트 주머니에 든 것을 꺼내 손등 위에 얹었다.
미지근하게 식어있던 탓에 김독자는 그것을 잘게 흔들며 말했다.
“아쉬워서 어쩌냐. 네가 스케이트를 이렇게 좋아하는지 몰랐네.”
“딱히? 타본 적도 없다.”
“아침부터 집까지 찾아와놓고는.”
“가고 싶었던 거 아니었나.”
“지나가는 말이었지.”
“…그렇군.”
겨우 그거 가지고 여기까지 왔다고. 언제부턴가 유중혁은 뭔가 하자고 하면 선뜻 그러마 하고는 했다. 여름날에 비하면 엄청난 변화였다.
“괜찮아. 다음에 오면 되지.”
“나중에나, 다음이 없을 수도 있지 않나.”
김독자는 다시금 문에 달린 팻말을 읽었다. 고작 정기휴무일 뿐인데 비장하지 않은가. 부들부들한 파우치에 담긴 쇳가루가 사각거린다. 단지, 겨우, 고작. 사소하고 곱게 달린 단어들이 뒤섞인다. 유중혁의 입 밖으로 튀어나온 문장이 산화하며 열을 일으켰다.
누군가 자신이 스쳐 가며 한 말을 신경 써주는 것이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김독자는 실실 새어 나오는 웃음이 멋쩍어 손난로만 마구 흔들어댔다. 손쉽게 잡히는 열기에 우쭐해졌다.
■
그것이 마지막 겨울인 줄은 미처 몰랐던 거다.
문을 열자 때맞춰 종이 울렸다. 유중혁은 샤프에 심을 채워 넣고 있었다. 그는 체육복 차림의 김독자를 발견하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급하게 계단을 뛰어오르기라도 했는지 뺨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어깨는 눈에 띄게 오르내렸다. 김독자가 책상을 잡아 쥐고서 숨을 고르는 동안 유중혁은 샤프의 뒷부분을 눌렀다. 챠칵, 챠칵. 길게 빠져나온 심을 도로 밀어 넣자 손끝에 흑연 가루가 남았다. 이름을 부르자 가느다란 입술이 달싹였다. 대답하려다 삼킨 것인지, 숨을 몰아쉬던 탓인지, 아니면 달리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던 건지.
“수업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너….”
묻거나 따지고 싶은 말들이 많았다. 계단을 오르는 도중에도 정리가 되지 않았다. 숨을 고르면서도 골라지지 않은 문장에 김독자는 뜸을 들였다. 주변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을 정도로 염치가 없지도 않았다. 팔을 낚아채듯 잡자, 놓친 샤프가 바닥을 굴렀다. 부러진 심이 운동화 끝에 부딪혔다. 유중혁은 얼굴을 찌푸렸다. 목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잠깐 얘기 좀 하자고 잡아끌 요량이었다.
앞문이 열리며 수학 선생이 들어섰다. 김독자는 교탁과 유중혁을 번갈아 보다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교과서 좀 빌려줘.”
“무슨 과목.”
“어, 체육.”
말하면서도 어이가 없었는지, 김독자는 체육복 상의를 잡아당겼다가 뗐다. 쓰지도 않는 교과서가 서랍 속에 들어있을 리는 없었다. “기다려.” 또박또박 발음한 유중혁이 사물함으로 향하는 사이 김독자는 떨어진 샤프를 주워들었다. 두어 번 눌러보니 고장이 난 것 같지는 않았다.
“너 이사 가?”
새것이나 다름없는 교과서를 받아들며 물었다. 유중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김독자는 샤프를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창문 모서리에 작은 틈이 깨져 있었다. 아마 예전에 화분 따위를 걸어둔 흔적이겠거니 추측하지만, 겨울에는 그저 찬 기운이 드나드는 골칫덩이였다. 청소가 끝나도록 김독자는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환기되지 않아 퀴퀴한 교실에서 유일하게 겨울바람 냄새가 나는 자리였다.
교실 문을 잠가야 하니 이만 나오라는 불평을 들었다. 김독자는 책상 위로 길게 뻗은 팔에 머리를 댄 채 듣지 못한 척을 했다. 이내 돌린 등 너머로 도란도란하는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목소리에 김독자는 눈을 떴다.
종례가 녀석의 반보다 늦지만 않았더라면 진즉에 도망갔을 거다. 일부러 미적거리는 김독자를 다 안다는 듯이 유중혁은 종례가 지나고 청소가 끝날 때까지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여튼 미련해 빠져서, 문단속은 내가 할 테니 가보라는, 뭐 그런 대화를 하는 것 같았다. 김독자는 다가오는 인기척에 도로 눈을 감았다. 깨진 틈과 잿빛 하늘을 가르는 창틀이 눈꺼풀 속으로 감춰졌다. 머리맡에 드리운 그림자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3반의 유중혁이 이사를 간다더라 하는, 이야기가 돌았다. 그즈음 김독자는 갈아신은 운동화 앞코를 바닥에 두드리고 있었다. 말도 안 돼.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것이었다. 오늘 아침도 유중혁과 함께 등교했지만, 그러한 낌새는 일절 없었던 탓이다. 김독자는 당장 유중혁에게 이 헛소문을 전달해줘야만 했다. 전학 온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웃기지 않냐. 다들 너한테 관심도 많다.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툭 치고는 내려올 생각이었다.
그러나 계단을 뛰어오르는 동안에는 억지로 무언가 생각할 겨를이 부족했으므로, 사고의 틈새로 자꾸만 기분 나쁜 예감이 들었다. 김독자는 당장, 유중혁에게 이 소문의 진위를 확인해야만 했다. 대화를 나누고 있던 이들에게 묻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반드시 유중혁이어야 했다.
내가 왜 네 소식을 다른 사람한테 들어야 해. 나한테는 언제 말하려고 했어. 나한테는 언제 말하려고 했어. 달리 친한 사람도 없으면서. 아이스링크에 가자고 할 때도 정해져 있었어? 어디로 가. 떠날 거면서 왜, 나랑 친해졌어. …안 가면 안 돼?
유중혁은 처음부터 키가 멀끔하게 컸고, 걸음이 빨랐고, 그다지 친해질 의사가 없어 보였고, 호의에 익숙하지 않았고, 나중으로 미루는 법이 없었다. 다시 말해 유중혁은 이별에 익숙했다. 녀석은 언제든 헤어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분명 하고 싶었던 말들이 많았는데 덤덤한 끄덕임에 모조리 눌러 삼켜졌다. 김독자는 유중혁에게 지나치게 아쉬워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아졌다. 더 많은 감정을 주면 손해 보는 기분이지 않은가. 혼자만 매달리면 바보 같으니까.
어깨가 뻐근해졌다. 모르는 사이에 힘이 들어가기라도 했는지. 김독자는 슬슬 유중혁이 저를 포기해주었으면 했다. 이제 와 기지개를 켜며 일어난 척하기에는 너무도 지체되어 있었다. 기어코 코끝을 붉게 물들이는 겨울바람 냄새와 시간이 흐르는 소리, 꿈틀거리며 정적을 유지하려 애쓰는 눈꺼풀과 다물린 입술. 다음 순간 김독자는 빳빳하게 널브러져 있던 손끝을 움찔거렸다.
손등에 닿은 것은 아마 입술이었을 거다.
부드럽지는 않았다. 찬 바람에 부르튼 살갗이 표면을 약하게 긁었다. 유중혁은 숨을 참고 있었지만 머금고 있던 온기는 감출 수 없었다. 지긋이 내려앉는 고개를 따라 코끝이 닿았다. 입술이, 피부 위를 눌렀다가 가볍게 떨어졌다. 공기 방울이 터져나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조심스러운 동작이 무색하게도 선명했다. 달팽이관으로 굴러든 떨림이 미칠 듯이 간지러웠다. 김독자는 손등을 벅벅 긁고 싶었다. 놀란 심장이 빠르게 뛰며 가슴을 압박했다.
방금 뭐냐고, 그에게 물어 답답함을 해소하고 싶었다.
“김독자. 이만 가자.”
그러나 유중혁이 먼저였다. 마치 처음부터 깨어있던 걸 짐작하는 듯한 어투였다. 몸을 일으키자 그는 책상 옆에 걸려있던 가방을 집어 들었다. 부러 고개를 숙여 표정을 감추려는 것도 같았다. 유중혁은 방금 그가 한 일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김독자는 물어볼 수 없었다.
그것은 며칠이 지나고, 몇 주가 지나고, 유중혁과 마지막 인사를 나눌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말대로 나중에 말고 그때 바로 물어볼 걸 그랬다. 유중혁은 마지막까지 이별에 참 익숙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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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혼자서 갈 수 있나?”
유중혁은 거듭 물었다. 늦은 시간의 지하철역은 한산했다. 김독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하행선을 타야 했고, 유중혁은 반대였다. 김독자는 그런데도 데려다주겠다고 나선 거냐며 웃었다. 유중혁은 웃지 않았다. 그다지 재밌지 않았던 모양이다. 김독자는 정말 괜찮았다. 선선한 바람을 맞아 술이 깬 참이었다. 어쩌면 유중혁이 한 말 때문일지도 몰랐다.
타는 곳이 떨어져 있어 내려가기 전 인사를 나눴다. 반가웠다는 말은 반은 진심이었고 반은 허울이었다. 몇 년 만에 만나 밥까지 먹은 것이 신기하기는 했다. 상대가 유중혁임을 고려하면 그리 놀랍지 않은지도 모른다. 다음에 또 만나자는 말은 일부러 하지 않았다. 여전히 번호도 교환하지 않은 채였다.
“잘 가.”
유중혁은 김독자의 머리통이 계단 아래로 사라질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걸음이 현저히 느리긴 해도 휘청거리진 않으니 괜찮겠지 싶었다. 술을 지나치게 많이 먹였다는 자각은 있었다.
‘너 그때 왜 나한테 키스했어?’
대답을 피하고 싶어서 화제를 돌리듯이 술잔을 채웠다.
‘그렇구나.’
마지막에야 털어놓은 건 변덕이었을까. 사실 그도 잘 알 수 없었다.
김독자는 멈춰선 채 고개를 주억거렸다. 속이 좋지 않은 모양인지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유중혁은 그의 등을 두드려주는 대신에 몸을 떨어트렸다. 찬 공기를 쐬게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야, 근데 있잖아. 김독자가 말문을 열었다.
‘너도 나한테 연락 안 했으면서.’
발음이 죄 꼬였다. 취한 정신머리로도 밑지기는 싫은 모양이지. 어처구니가 없어서, 유중혁은 헛웃음을 뱉었다.
‘내가 멋대로 …해서 기분 나빠한다고 생각했다.’
‘맞아. 자는 사람한테 하는 게 어디 있어.’
‘자는 척이었잖냐.’
‘그러면. 내가 벌떡 일어나서 키스라도 해야 했냐?’
‘…….’
‘헤어지기 싫다고 해서 남아있을 것도 아니었잖아.’
눈이 마주친 김독자는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자신이 한 말을 정정하지는 않았다. 그는 마른세수하며 덧붙였다. 젠장, 쪽팔리게.
잘근거린 입술이 쓰렸다. 유중혁은 뒤를 돌아 계단을 내려갔다. 철로 너머로 김독자가 비스듬하게 서 있었다. 모르는 척 멀리, 그가 닿지 않는 곳까지 자리를 옮기려 했다. 시선이 닿아 그럴 수 없었다. 김독자는 손을 들어 보였다. 유중혁은 전광판을 살폈다. 늦은 시간이어서인지 지하철 간격이 길었다.
텅 빈 승강장이 이상하게도 비좁게 느껴졌다. 김독자와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깝다는 착각이 들었다. 아마 사람이 가득 차 있어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생각한다. 고작 몇 시간 전의 건널목에서처럼. 유중혁은 전광판을 살폈다. 파란색 신호등에 불이 들어오는 대신 지하철이 다가오고 있었다.
김독자가 많은 질문을 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사실 그가 할 수 있는 질문은 많았다. 왜 나한테 키스했어? 왜 이름을 불러 붙잡았어? 왜 밥이라도 먹자는, 인사치레에 어울렸어?
안내방송이 퍼졌다.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던 김독자도 방송을 들은 모양인지 고개를 들었다. 쇠의 마찰음이 역사 내를 울렸다. 꺾인 모퉁이 너머로 빛이 들어온다. 발아래가 잘게 진동했다. 김독자는 마주친 눈을 두어 번 깜박거렸다. 언뜻 손을 들어 인사를 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김독자. 손등에 하는 키스는.’
애초부터 그는 많은 질문을 할 필요가 없었다. 왜 나한테 키스했어? 왜 이름을 불러 붙잡았어? 왜 밥이라도 먹자는, 인사치레에 어울렸어? …왜 여전히 그 질문에 답하지 못해? 숱한 질문은 결국 하나의 답으로 귀결한다.
‘헤어지기 싫다는 의미다.’
매미 소리에 희석된 목소리처럼 김독자의 모습은 빠르게 달려든 지하철에 가로막혔다. 그러나 유중혁은 김독자가 그의 손등에 입술을 부딪치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여름에는 생수를 뺨에 문지르며 길을 올랐다. 겨울에는 따뜻한 음료 하나를 사면 하나씩 더 주길래, 양쪽 주머니가 무거웠다.
지나간 계절을 추억하는 건 그렇게나 의미가 없다.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그렇구나, 하고 수긍하는 것뿐이었다. 뒤늦게 말을 덧대어봤자 이미 지나간 계절을 고쳐 쓸 수는 없지 않은가. 뒤로 감은 카세트를 몇 번이고 재생해도 내용이 달라지지 않는 것처럼.
지하철이 멀어져간다. 맞은편 승강장은 이제 텅 비어 있었다. 김독자는 손등에 닿은 까슬한 입술을 기억했다. 유중혁의 이름을 곧바로 떠올리지 못했듯이 그 기억도 언젠가 깊게 가라앉을 것이다. 누구나 그런 식으로 새로운 계절을 살아간다.
김독자는 몰려오는 피로감에 눈을 감았다. 소리가 들렸다. 귀를 기울이니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비단 지하철 소리만은 아니었다. 김독자는 눈을 떠, 흘긋 옆을 향했다. 눈이 마주쳤다.
도망쳤다.
추격전은 기나긴 승강장을 완주하고서야 끝이 났다. 계단을 반쯤 기어오르던 김독자는 셔츠 깃을 붙잡혀 허우적거리다 주저앉아버렸다. 그는 혀를 내밀어 숨을 내쉬었다. 급하게 손사래를 쳤다.
“잠…깐. 유중, 혁. 살려… 나 제대하고… 헉, 처음 뛴다.”
굳이 말로 내뱉지는 않았어도 마주한 표정이 한심해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겠다. 김독자만큼 힘들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유중혁의 이마에도 땀이 맺혀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훔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김독자의 옷깃을 세게 움켜쥐었다.
“야, 야. 안 도망가. 못 가.”
“도통 이해할 수 없군.”
“네가 너무 무서운 얼굴로 뛰어와서….”
“죽고 싶은 건가.”
“미안해.”
“김독자, 왜 그렇게 집요하게 질문해댔지.”
확 끌어당긴 탓에 말문이 막혔다. 김독자가 눈동자를 미끄러트리자 유중혁은 인상을 찌푸렸다.
“대답해라.”
“취하면 원래 다 그러잖아.”
“개자식.”
유중혁은 김독자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다리가 볼품없이 후들거렸다. 억지로 맞춘 시선이 매서웠다. 김독자는 더 이상 유중혁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자 왠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중혁아.”
“또다시. 왜냐고 물어보면 가만두지 않겠다.”
김독자는 곧장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금세 빠끔거리며 열릴 수밖에 없었는데, 까슬한 입술이 맞닿은 탓이었다. 그것은 기억보다 거칠었고 기억보다 뜨거웠으며 기억보다 더, 좋았다. 방과 후 교실 위로 차가 끊긴 승강장이 덧그려진다. 손등에 조심스레 닿던 입술은 이제 김독자의 입술을 잡아 뜯을 기세다. 움직이지도 못하고 부딪힌 살갗에만 집중하던 김독자는 입술이 떨어질세라 유중혁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는 교복 대신 정장을 입었고, 조금만 달려도 버거웠고, 진득하게 혀를 밀어 넣었다. 그러나 떨어진 시간이 무색하게도 터질 것 같은 심장은 변함없었다.
헤어지기 싫다고 해서 남아있을 것도 아니었잖아. 하지만 솔직하게 헤어지기 싫다고 말했더라면 떠난 후에도 계속 만날 수 있었을까.
“나 막차 끊겼다.”
“데려다주겠다.”
김독자는 의미 없는 가정을 관두었다. 지나간 나날을 후회해봤자 상황은 뒤바뀌지 않는다. 김독자는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춘 후 속삭였다. 뒤로 감은 카세트는 몇 번이고 재생해도 내용이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지 말고. 너희 집 갈까.”
그러나 그 위로 새로운 계절을 덧쓸 수는 있는 법이다.
손등 키스
'당신과 헤어지기 싫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