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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주

287.5

​나는 진천패도를 뽑아 들었다. 기억보다 묵직한 녀석의 검. 피가 말라붙은 검신 위를 새카만 빗방울이 구른다. 검은 혈흔이 지워지기는커녕 생생하게 덧입혀지는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뒤로 돌았다.

유중혁은 주저앉은 그대로였다. 점차 굵어지는 빗발에 상처가 벌어졌는지 얼굴이 온통 검붉게 얼룩져있었다. 끈적한 빗물이 남긴 자취로 산산조각 난 얼굴에 다시 한 번 가는 실금이 그인다.

 

“……비 온다. 자리 옮기자."

 

겨우 입을 떼고, 앞서 걸었다.

 

「멍청 한김독 자」

'시끄러워.'

 

등 뒤로 그가 일어서는 기척이 났다. 제대로 따라오는지 귀를 기울이며 눈으로는 주위를 살폈다.

 

전투가 끝나자 사냥이라도 할 것처럼 느릿하게 거리를 좁히던 괴수들은 비가 내리기 시작하니 밤이 온 것마냥 자리를 찾아 눕기 시작했다. 실제로 밤에 가까운 시간이었으니 다를 것은 없지만, 기이한 행동이었다. 암묵적인 휴지기인가. 그렇다고 성좌나 마왕까지 얌전히 잠든다는 보장은 없으니 되도록 이곳에서 떨어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나나 대천사들이나 오자마자 전투에 휘말려 조금 지쳐있었다. 어그로를 끌던 도중에 우울증이 도져 한참을 맞아터진 유중혁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얼마 안 가 적당한 장소를 찾을 수 있었다. 반절이 날아간 주택이었는데 짐 싸서 떠난 흔적이 역력한 걸 보니 주워갈 게 없는 집이었다. 그래도 만일을 위해 둘러본 후 처음 들어갔었던 방으로 돌아왔다. 온통 어질러져 있긴 해도 침대가 있었다. 창문도 커다란 게 붙어있어 동정을 살피기 나쁘지 않아 보였다.

방 두 개를 놓고 품평하는 동안, 유중혁은 꼬리처럼 나를 따라다녔다. 나는 힐끗 그의 얼굴을 돌아보고 당장 쓸만한 물건을 아공간에서 꺼내 던져주었다. 그는 민첩하게 잡아챘다.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나를 보았다. 명령을 바라는 것이다. 갠가?

 

"지금 엉망이니까 그걸로 씻어."

 

일거수일투족이 스타 스트림에 생중계되는 화신들은 위생 관리가 필수기 때문에 대부분 샤워 키트를 몇 개씩 상비하고 다녔다. 호감을 사기 위해서가 아니라 계속되는 전투를 오래 버티기 위해서라도 피땀은 씻어낼 필요가 있었다. 그러니까 '보통'은 말이지. 1863회차의 그는 어딜 부수고 누굴 죽이는 스케줄로 가득 차 있어서 얘기가 다르다.

지정해준 방으로 걸어가는 유중혁의 꼬질꼬질한 뒷모습을 슬프게 바라보고 있는데 요피엘이 말을 걸어왔다. 여전히 경계하는 어조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이곳에서 밤을 보낼 생각인가.]

"아. 보시는 바와 같이, 그렇습니다."

 

나는 코트를 의자 등받이에 걸친 후 침대에 걸터앉았다. 어디가 눈인지 알 수 없지만 코스모스를 마주 보고 있으니 요피엘이 못마땅하게 말을 이었다.

 

[나와 가브리엘은 힘을 비축해두겠어.]

 

하긴. 95번 시나리오를 수행하는 1863회차는 막대한 힘을 가진 대천사에게도 낯선 이계다. 살아남은 이들도 침공한 괴수도 난이도만큼 강하니 모든 이를 미래의 적으로 간주해야 하는 이 상황에서는 축난 기력을 한시라도 빨리 보충해야 했다.

 

"그러세요.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내일도 부탁드리겠습니다."

[……뻔뻔한 녀석이군.]

 

가브리엘은 마기가 감지된다면 눈을 뜨겠다는 말을 남기고 이내 조용해졌다. 요피엘도 더 말이 없었다.

 

 

 

 

 

나는 한가롭게 바깥을 주시했다. 이런 날씨에 밖을 싸돌아다니는 멍청이가 있을까? 자문해봤지만 알 수 없었다. 이 세계는 또라이로 가득 차 있었다. 문득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어두워진 방 안에 더 짙은 어둠이 빚은 인영 하나가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제일가는 미친 놈, 유중혁이었다. 순간 소리 지를 뻔한 것을 참고 애써 웃었다.

 

"왔으면 말이라도 하지 그랬냐."

 

사실, 말을 하는 게 더 소름끼칠 일이다.

 

"나도 씻고 온다. 가만히 있어."

 

코트도 빨까 고민하고 있는데 툭, 소리가 들렸다. 금이 간 유리창에서 빗방울이 떨어지는 게 아니라 녀석의 머리카락 끝에 물방울이 맺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명령을 더 상세히 했어야 했던 걸까 아니면 평소에 머리를 안 말리는 걸까. 나는 혀를 차며 키트에서 수건을 꺼냈다. 머리에 얹는 건 너무 다정한 거 같아서 손에 쥐여주니 그는 반사적으로 그것을 움켜쥐었다.

 

"제대로 말려."

 

극도로 단련한 그의 몸이 감기 따위에 걸릴 것 같진 않았지만, 이건 기분의 문제다. 나는 어지간하면 그를 잘 돌봐주고 싶었다. 미래를 위한 투자같은 건 아니다. 가능하다면 물론 좋았겠지만 1863번째 유중혁은 원래 회유 끄트머리도 할 수 없다. 호의를 받아들이는 기반 자체가 다 문드러졌다.

뭐, 어쨌거나. 어깨를 툭 두드려주고 방을 나섰다.

 

 

문을 열자 축축한 공기가 확연히 느껴졌다.

그 사이에 비가 더 굵어졌는지 처음 집에 들어왔을 때보다 더 세게 퉁탕거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고개를 빼고 들여다 보았다. 벽과 천장이 사라진 자리로 비가 몰아치고 있었다. 검은 빗물이 흰 거실 바닥에 파도처럼 고이다가 더러는 부서진 타일을 타고 바깥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스산하게 드러난 철근 너머는 더없이 어둡게 번들거렸다. ……배 속이 베인 듯 사늘해졌다.

 

이 집의 일상은 언제 부서진 걸까, 나는 이야기를 읽듯이 생각에 빠졌다.

 

 

 

 

 

 

 

 

 

**

 

 

 

 

 

 

「변 태」

……조용히 해.

「흥」

 

나는 '제4의 벽'을 무시하며 옷을 입었다. 마른 옷가지에선 좋은 향기가 났다. 간이 세탁기를 접어 키트 안에 넣은 후, 작은 방을 나왔다.

훈기를 느끼는 것도 잠시, 축축한 공기가 훅 다가왔다. 재빨리 침대방으로 돌아왔다.

 

문을 닫는 소리에 유중혁이 나를 돌아보았다. 머리는, 몇 가닥 만져보니 말라있었다. 나는 여태 수건을 들고 있는 그의 손을 일별하고 대환단을 찾아 던져 주었다. 씹어 삼키는 시늉을 하자 그가 따라 한다. 목울대가 움직이는 걸 확인하고 수건을 회수해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자잘한 정리를 마친 후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동안 그는 조용히 서 있었다.

문득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호기심이 생겼다. 라이트를 켜 그에게 빛을 쏘자, 그의 얼굴에 뚜렷한 음영이 생겼다.

이건……, 명백히 셔터 찬스였다. 지치고 피곤한 표정이 날카로운 외모와 잘 맞물려 특유한 분위기를 형성하니 이 나조차 순간 침을 삼킬 정도로 퇴폐적인 미남자가 완성되었다. 분명 떼돈을 벌 수 있을 텐데…….

 

그는 눈이 부신지 눈매를 가르스름히 뜨고 나를 보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라이트를 껐다.

시선은 다시 어둠 속에 묻혔지만, 나는 방금의 얼굴이 시야에서 떠나지 않았다. 마치 분노한 것 같기도 하고, 실망한 것 같기도 한 눈빛…….

그는 지금도 나를 보고 있을 것이다. 표정이 묻어있지 않은 얼굴로.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저려와서, 나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비는 그칠 기미가 없었다.

 

 

 

종종 상상하곤 했다. 알고 있는 정보를 이용해 루트를 짜고, 동료를 이끌며, 시나리오를 클리어하는, 멸살법 속의 나를.

그 상상 속에서 나는 유중혁의 유일한 친구였다.

소설은 현실이 아니고 사건은 실현되지 않으며 그는 살아있지 않다. 나는 누구보다 현실적이었고 그러니 그건 그저 어린 시절의 몽상이었다.

 

그러나 멸살법은 이제 현실이 되었다. 나는 유중혁과 만났고 동료가 되었다. 어쩌면 친구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끔 여전한 의문이 든다. 이 이질감은 뭘까.

나는, 어디에 있지?

 

「흐 음」

 

나는 뒤척이고 있었다.

나의 판타지, 바랐던 이상향이 이곳에 있었다. 수천 번도 넘게 그려왔던 순간.

그가 내 앞에 나타나 머나먼 다른 세계로 이끌어주기를 얼마나 꿈꿔 왔던가.

 

마치 꿈처럼, 칠흑같은 어둠 속에 그가 서 있었다.

텅 빈 눈으로, 모든 기력을 포기한 그대로.

 

나는 손바닥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그를 읽을 수 있었다.

 

[전용스킬, '제4의 벽'이 활성화됩니다!]

 

수없이 많은 문장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간다.

 

일상을 부수고 인간을 뜯어먹는 괴수, 저악한 인형극을 위해 인간을 설치하는 도깨비, 잔학한 콜로세움을 권태롭게 요구하는 성좌들. 별처럼 빛나는 '이야기'에 종막을 내리는 이계의 신격들.

 

타인을 믿고, 믿지 않고, 의지하고, 배신하고, 지키고, 이용하는 수많은 사람들.

무릎 꿇리는 절망에 저항하면서 걸어나가는 모든 이들.

 

행렬의 선두에 네가 있었다. 좌절해 주저앉고, 도망쳐 외면하고, 비관에 쓰러지더라도 삶은 다시 이어졌기에, 너는 일어서야 했다.

 

다시 앞을 향하여.

 

끝나지 않는 어둠을 향하여.

 

바스라지면서.

 

그 순간 벼락이 쳤다.

[전용스킬, '제4의 벽'이 흔들립니다.]

 

정말로 찰나였다. 다시 도시는 어둡게 가라앉았고 그 위로 여전히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몽롱하게 눈을 깜빡였다. 유리 두 장으로 옅어진 빗소리가 방을 메운다. 나는 이 방에서 살았던 누군가의 흔적과 정물처럼 움직이지 않는 그를 함께 보았다. 호흡은 뜨겁고 목덜미에 닿는 공기는 축축했으며, 심장은 온몸에서 쿵쿵거렸다. '착각이었나.' 글자를 타이핑한다. 부정이라도 하는 것처럼 곧이어 우르릉, 멀리서 천둥이 울렸다. 떨리는 손으로 눈가를 꾹꾹 눌렀다. 감은 눈꺼풀 위로 붉은빛이 스며들었다. 이따금씩 희고 푸른 마력 파동이 시야 구석에서 번쩍거렸다. 어딘가에서 격렬한 전투가 일어나고 있나, 어지럽게 생각했다.

 

그는 나를 보고 있었다.

검은 하늘을 깨트린 노란 빛이 그의 오른눈에 스며들어, 나를 보았다.

 

 

나는 이미 어릴 적에 내가 평생 외롭고 불행할 것을 알았다.

누구도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그들을 보지 않았다.

 

하지만 나와 닮은 네가 살아가고 있어서, 포기하지 않고 걸어가고 있어서.

나는 너로 인해 살았다.

너를 부르며 살았다.

네가 나타나지 않아서 나는 너처럼 살기로 했다. 포기하지 않기로 밤마다 다짐을 덧새겼다.

 

 

 

"유중혁,"

 

낯선 목소리였다.

 

"이리 와."

 

어두운 사위에도 스며드는 빛이 있다. 흐릿한 빛살이 어둠과 섞여 그에게 드리우는 그림자의 농담(濃淡)을 바라보았다. 드문드문 찾아드는 색색의 빛이 조명처럼 그를 비춘다. 변함없이 아름답게 빛나는 검은 눈동자. 아득하게 올려다 본다.

 

수만 번의 절망으로 담금질한,

저물지 않을

 

[전용스킬, '제4의 벽'이 강하게 활성화됩니다!]

 

나의 광원.

 

 

나는 서툴게 너의 손을 잡았다. 거칠한 살갗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수만의 피를 묻힌, 수호자의 손.

 

의미는 유성처럼 어둠을 희게 그으며 머나먼 곳으로 떨어졌다.

 

누구도 이해 못할 너를 나는 오랜 시간 지켜보았다. 나는 비밀스러운 공범자였다. 나는 네가 흘리는 피를 마시고, 너조차 돌아보지 않는 기억을 주워 품에 담았다. 현실보다 선명한 '이야기'에서 살았다. 네 등을 좇는 나는, 너의 후계자였다.

 

그러니까 나는…….

 

누구보다도 가까이에서, 너의 가장 먼 곳에. 나는 고개 숙여 키스했다.

누구보다 대단한 너를 따라왔다고, 최초의 목소리를 온기에 눌러 담았다.

손 끝 키스

칭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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