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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쿰님

환상적인 연애

[화신 ‘유중혁’이 사망하였습니다.]

[성흔 ‘회귀 (Lv.???)’가 발동합니다.]

[화신 ‘유중혁’의 사망으로 회귀가 자동 결정되었습니다.]

 

또 하나의 메인 시나리오가 끝났음을 알리는 창 위로 검은 글씨가 덧씌워졌다. 상아색 바위 위로 떨어진 붉은 핏방울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흐름이 멎은 듯 멍한 머리로 어떠한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일순 정적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전용 스킬‘제 4의 벽’이 무너질 듯 강하게 흔들립니다.] 알림이 메아리처럼 귓가에 웅웅거렸다. 그러나 김독자는 마치 그 소리를 듣지 못한 사람처럼 가만히 서서 두 눈만 깜빡였다. 마치 시야에 잡힌 이물질을 흘려보내려는 듯. 하지만 수없이 눈을 깜빡여도 비극의 한 장면은 변하질 않았다. 이상하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 이상하다. 그리고 그 생각의 끝에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한 번. 단 한 번의 비명소리가 공간을 뒤덮자 술렁거림이 점차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인형처럼 멍하니 멈춰 있던 사람들이 깨어나 움직이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비틀거렸고, 누군가는 주저앉았다. 누군가는 제 눈가를 비벼보기도 했으며 누군가는 아직도 소리가 나오지 않는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그 모든 사람들 속에서 김독자는 꿋꿋하게 홀로 서 있었다. 참 소란하다. 그런 생각도 얼핏 했던 것 같다. 김독자는 다시 눈을 깜빡였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다시, 세 번. 한 번 눈을 깜빡이자 이설화와 이지혜가 저를 지나쳐 앞으로 달려 나갔다. 두 번 눈을 깜빡이자 한수영이 드물게 놀란 표정으로 저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 눈을 깜빡이자,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소의 침착함은 간 데 없이 흔들리는 목소리였다.

 

“독자씨!”

 

김독자는 그제야 숨을 쉬었다. 아니, 그제야 제가 숨을 쉬지 못하고 있었단 사실을 자각했다. 김독자는,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반응해 벌게진 얼굴로 옆을 돌아보았다. 흔들리는 유상아의 눈동자가 제게 묻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죠?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그 옆에선 아직도 어린 티가 묻어 있는 아이들이 김독자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김독자는 이해가 가질 않았다. 왜 다들 나를 보는 거지? 김독자는 열심히 머리를 굴려 보았으나 해답이 나오질 않았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갔다. 김독자를 바라보는 눈빛이 초단위로 변해갔다. 순간적인 당황과 흔들림, 도움을 청하는 눈빛. 그리고, 움직이지 않는 김독자를 보며, 저들과 마찬가지로 예기치 못한 상황에 당황하는 김독자의 얼굴을 보며, 곧 희미한 불안과 절망으로 이어져가는 눈빛. 허공에서 얽히는 일행들의 시선은 거울처럼 맞닿아 있었다. 모두 숨을 멈췄다. 움직이지 않았다. 저 멀리, 엎어진 유중혁의 몸뚱이를 붙든 이지혜의 서러운 울음만 울려 퍼졌다.

 

곧 유중혁에게서 빛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미 시스템 메시지로 확인하였건만 사람들은 그 빛을 보고서야 유중혁의 죽음을 완벽히 실감했다. 모두 움직이지 않는 몸을 이끌고 유중혁에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김독자는 그 모습을 망연히 보고 있다 이내 고개를 숙였다. 아무 것도 보고 싶지가 않았다.

 

“야! 네가 정신을 놓고 있으면 어떡해?”

 

갑자기 나타난 손 하나가 제 팔목을 쥐고 끌어당기는 느낌에 김독자가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저의 앞으로 성큼 다가온 한수영이 그런 김독자의 모습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김독자는 그 얼굴을 마주하고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아직까지도, 김독자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아냐. 침착하자. 김독자는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팽팽 돌려보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저 멀리서 유중혁의 몸은 착실히 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진짜 이대로 끝낼 거야? 야! 정신 안 차려?”

 

김독자는 한수영이 이끄는 대로 하염없이 달렸다. 얼굴에 닿는 바람을 맞으며 김독자는 점점 제 정신이 또렷해지는 걸 느꼈다.

 

[전용스킬 ‘제 4의 벽’이 다시 몸을 일으킵니다!]

 

그 소리에 김독자는 제 눈을 꽉 감았다. 여전히 떨림은 진정되지 않았다.

 

[전용스킬 ‘제 4의 벽’이 매우 강하게 활성화됩니다!]

 

들려오는 알림음에 이번엔 이를 악물었다. 전신에 스파크가 넘실거렸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멸살법’에서도 유중혁이 죽었던 회차는 수없이 많았다. 그리 생각하며 다시 머릿속으로 들이닥치는 모든 정보를 떠올려보았다. 현 상황에서 도움이 될 수 있을 만한 정보라면 무엇이든 좋았다. 하지만 이내 절로 욕을 뱉지 않을 수 없었다. 유중혁이 죽었던 모든 회차에서 일어났던 일? 빌어먹을 다음 회차로 넘어갔을 뿐이지. 하. 한숨을 내뱉고 그저 유중혁을 향해 열심히 달렸다. 그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이내, 사그라드는 유중혁을 향해 손을 내밀었을 때.

 

“유중혁..!”

 

뻗어진 손이 유중혁의 팔에 닿자마자, 유중혁의 몸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허공으로 흩어지는 밝은 빛의 조각들을 보며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한참, 아무도 긴 침묵을 깨지 못했다. 정적이 사방에 내려앉았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한수영이 저의 어깨를 툭 쳤다. 볼품없이 흔들린 몸이 다시 균형을 잡으며 제 자리를 찾았다. 어라. 다시 허공을 한 번, 그리고 텅 빈 제 손을 한 번 바라보다, 시스템 창을 열어 ‘한낮의 밀회’를 작동시켰다. 유중혁과 연결된 단 하나의 연결고리. 쉽게 손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망설이고, 또 망설이다 결국 조심스럽게 유중혁을 불러보았다.

 

[스타스트림에 화신 ‘유중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한낮의 밀회’가 자동으로 꺼졌다.

 

▾▾▾

 

어느새 해가 지고, 시나리오 지역에도 밤이 찾아왔다. 나는 멀끔한 모습으로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는 이미 찾아 놓은 은신처로 걸음을 옮겼다. 걷는 걸음마다 조각난 괴수종의 살점이 밟혔다. 끈적한 체액도 발자국 모양을 남겼다. 쯧. 짧게 혀를 찬 나는 비교적 깨끗한 흙바닥 위에 신발을 벅벅 문지르곤 다시 걸어갔다. 바람이 선선했다. 어디서 흐린 재의 향이 묻어오는 것 같기도 했다.

 

한참을 걷자 점차 어두워진 하늘에 별이 하나 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지는 않았다. 오늘은 보름달이 뜨는 날인데. 그리 생각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고개는 들지 않았다. 나는 땅만 보며 걸어갔다. 이내 동굴 하나가 나타났다. 성인 남성이 들어가기엔 약간 낮아 보이는 입구를 손으로 짚으며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등불을 켜자 의외로 건조하고 아늑한 내부가 드러났다. 대충 자리를 정리하고 털썩 주저앉자 숨길 수 없는 냉기가 몸을 타고 올라와 눈가를 찌푸려지게 했다. 얼른 온기를 불어넣고자 곳곳에 불을 켜 놓은 나는 이내 옆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푹신하고 도톰한 담요 같은 것들을 어떻게 구해와 바닥에 깔아 놓았다. 세 바퀴 정도는 뒹굴어도 괜찮을 만큼 넓게 자리를 정리한 나는 다시 그 곳에 털썩 주저앉았다. 조금씩 따뜻함이 퍼져나가는 것 같아 기분이 노곤해졌다. 저도 모르게 눈이 감겼다. 아, 또 눈앞에 누군가의 얼굴이 그려졌다.

 

저는 태생적으로가 꽤 고집이 센 사람이었다. 나를 얄팍하게 아는 사람들도 이 점에서는 공통적으로 동의를 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더불어 나는 눈치가 없는 편이기도 했다. 이 점에서는 사람들의 의견이 좀 더 분분하게 갈릴 수도 있는데, 나는 확신한다. 특히 감정에 대해서 나는 정말 무지하고 눈치 없는 사람이라고. 이것은 마냥 남에게만 국한된 내용이 아니었다. 나는 내 감정조차도 쉽게 깨닫지 못하고, 인정하지도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어려서부터 놓쳐버리는 게 많았다. 제 마음 하나조차 똑바로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었으니. 그리하여 나는 생각했다. 내게 진정한 사랑이니 우정 같은 말들은 영 어울리지 않는다고. 그런 감정들이 내게 찾아오더라도 나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거라고 말이다. 돌이켜 보자면 나는 스스로의 평가에 박한 편이었다.

 

사랑이라는, 말하기도 민망하고 어쩐지 간질거리는 그 미묘한 감정은 멀쩡히 살아가던 나를 어느 순간 덮쳐버리는 거대한 파도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희미하게 조금씩 차오르는 물안개 같은 것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면 이미 눈앞은 흐릿해서, 아무 것도 볼 수 없게 하는 것. 반투명으로 너울거리는 장막 저 편 무언가 어른어른 하기는 한데, 그것이 무엇인지를 도무지 알아볼 수 없게 하는 것이었다. 그걸 깨달은 것은 정말 얼마 되지 않았다. 불과 몇 달 전일까. 자각하는 순간 저는 제 주변을 뒤덮은 그 물안개에 저는 퍽 당황했었지. 돌이켜보자 웃음이 나왔다. 이미 머리끝까지 차오른 그 감정을 저는 차마 막아낼 수 없었다. 아니, 막아내기는커녕 그것이 나를 가득 채우는 순간까지도 그 감정이 어디까지 차올랐는지 깨닫지 못했었다. 그렇게 한동안 그 감정에 눌려 허우적대었다.

 

“중혁아.”

 

사랑을 불러보았다. 그러자 흩어져 있던 형체가 빠르게 제 자리를 찾았다. 유중혁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다. 중혁아. 다시 한 번 제 사랑을 불러보았다. 어쩐지 얼굴을 찌푸릴 네 모습이 상상되어 조금 웃음이 터졌다.

 

너를 처음 본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설렘? 두근거림? 혹은 감탄이나 기쁨? 그런 감정이 있었을까.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건, 처음의 너는 정말 재수 없는 놈이었단 사실이다. 물론 그리 부정적이기만 한 평가는 아니다. 너는 처음 만난 나를 다리 아래로 던져버린 재수 없는 놈이지만, 너를 보는 내 마음엔 긍정적인 감정이 더 컸다. 이해할 수 없겠지. 나조차도 왜 그랬는지 명확하게 알 수가 없었다. 그냥 내 온 인생의 절반 정도를 바쳐 그려온 너를 직접 마주하게 된 탓이라 생각하고 넘겼었다.

 

참 쌀쌀맞고 퉁명스러운 사람이었다. 차갑고 무뚝뚝하고, 사납고 딱딱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내 눈에는 유중혁, 네가 그렇게 보였다. 너도 지니고 있었을 고통이나 상처가 보이지 않았던 것도 같다. 그럴 수밖에. 내 눈에 너는 아주 납작하고 평면적인 사람이었으니까. 나는 지면 속에서 마주한 너를 현실로 끌고 나왔다. 그곳에 웅크린 너에 대한 서술은 남아 있지 않았다. 네가 어떤 고통을 겪고 어떤 죽음을 맞이해 왔는지 나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지. 나는 너를 들여다보려 노력하지 않았다.

 

네게 깊은 정을 붙이지 못하였다. 너를 아꼈고 네게 헌신했으나 너와 인간적인 유대를 만들어가려 노력하지 못하였다. 어쩌면 그건 상처받는 것을 몹시도 싫어하는 인간의 본능적 방어막 같은 것이었는지 모른다. 너는 위태롭게 우리를 겉돌았고, 내 눈에 너는 언제고 사라질 것만 같은 타인으로 보였으니까.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이미 그때 즈음의 나는 네 말 한 마디에 귀를 기울이고 네 모든 행동에 항상 눈을 두고 있었다. 그 마음을 너에 대한 의심과 걱정으로 치부하면서.

 

그로부터 한참이나 오랜 시간이 더 흘렀다. 너는 나를 떠나지 않았고, 나는 네게로 향하던 미심쩍은 눈초리들을 모두 거두었다. 우리는 어느 순간 서로가 언급되면 자연스레 함께 떠오르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말로는 생과 사를 따로 한 동료라 하였으나, 서로 등을 마주대고 생사를 넘어 고락까지 나누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나는 가끔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내 마음과 머리의 괴리가 있었다. 너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네게 비밀을 만들고 진실을 숨겼다. 너를 위한다는 말로 나는 네가 원하지 않을 일들을 행했다. 내가 왜 너에게 이렇게까지 행동하는 거지? 의문은 문득 나를 찾아왔었다. 항상 물음의 직후엔 마음에 세워진 벽이 흔들렸다. 물론 그 의문은 곧 잊혀 갔지만.

 

나는 너를 좋아했나? 지금 와서 생각해보자면, 아마 그랬을 거다. 이미 말했나 싶지만 너는 내 인생의 절반을 함께한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 나에게 너는 유일했다. 그 특별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이다. 그러니 나는 너를 좋아했을 거야. 그 말을 떠올리자 나는 다시 웃음이 터졌다. 네게 말해줬다면 좋았을 텐데. 그 유중혁의 얼굴이 내 말 한 마디에 와그작 구겨지는 꼴을 본다면 어찌 즐겁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너를 좋아했다. 그래서 너를 돕고자 했고, 너를 살리고자 했고, 너와 함께 가고자 했다. 사실 처음엔 그리 순수한 마음은 아니었지만. 내 삶에 네가 필요했고 그렇기에 네게 손을 뻗었지. 이 마음이 변하게 된 건 언제였을까. 너는 점점 더 내게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 단지 필요와 효용만을 따져보지 않아도 너는 내게 소중한 사람이었다. 나는 너와 가까워지고 싶었다. 등을 마주하고, 우리를 향해 날을 세우는 세상을 바라보는 것만이 아니라 그 몸을 돌려 너와 눈을 마주하고 싶었다.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어 내 모든 것을 네게 말해주고 싶었다. 숨기는 것이 없고, 그렇기에 솔직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내 속기만 했던 너를 내가 알았으니까. 내가 너의 유일한 이해자가 맞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내가 왜 널 위해 이렇게까지 하고 싶은 거지? 의문은 다시 찾아왔다. 마음의 벽이 한 번 더 요동쳤다. 네 얼굴을 떠올리고, 감은 눈으로 그 모습을 세세하게 덧그리자 떨림이 진정되었지. 맑아진 머리로 나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셨다. 그때부터 나는 너를 사랑하기로 마음먹었다.

 

수십 년, 살아온 날들이 무색하게도 나는 사랑에 무지했다.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던 감정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까. 그렇기에 나는 조금, 아니 사실 아주 많이 서툴렀고 또 서툴렀다. 내 사랑의 방식은 무식하기 그지없었다. 항상 너를 위해 살기로 했다. 좀 더 적극적으로.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내 사랑의 방식은 무식했다. 맹목적일 정도로.

 

내가 원했던 것은 너와 사랑하는 게 아니었으니까. 중혁아.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면 퍽 쓸쓸한 목소리였을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나는 다만, 너를 사랑하는 것에 만족했다. 나는 너를 사랑해. 그런데 그걸 네가 알 필요 있나? 다른 누군가가 들었다면 경악할 말이었지만 내겐 진지한 물음이었다. 사랑에 가장 필요한 덕목은 배려라 했던가. 그 말을 좀 더 빨리 이해했더라면 좋았으려나.

 

많이 힘들었어? 한 번도 건넨 적 없던 질문이 떠올랐다. 물론 이제는 대답이 돌아올 리가 없는 질문이기도 했다. 많이 힘들었겠지. 나는 나름대로 대답을 만들어냈다. 예전의 내가 들었다면 적극적으로 부정을 표할 대답이었다. 하지만 중혁아. 이젠 알아. 내 행동이 너에게 고통으로 다가갔을 수 있다는 걸. 그래. 상처를 주고받지 않는 관계가 어디 있다고 나는 네 상처에만 그토록 무지했을까. 네 대답이 듣고 싶다. 네 목소리로 말하는 답이 듣고 싶다. 그렇다면 나는 내 욕심껏 네게 미안해 말이라도 해주었을 텐데.

 

어릴 적 나는 늘 네가 달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생각했다. 자정과 닮아 있는 검은 머리카락도 한없이 딱딱하고 차가워보이던 네 분위기도, 활기가 넘치는 태양과 대조적인 그 왕좌의 자태가 달과 닮아 있다 생각했었다. 너는 다가가기 힘들면서도 뭇 사람들을 우러러보게 하는 사람이었다. 어둠 속에 홀로 서있는 지독히도 외로운 달. 차갑고도 아름다운 밤하늘의 주인. 사람은 출입할 수 없는, 저 먼 천구의 끝에 군림하는 존재. 그게 네가 아닐까 생각했다. 막연한 생각이었다. 활자로 다가온 너는 내게 유일하고, 강인하고, 영원한 존재였으니까. 닮지 않았나? 그 생각은 내가 이 유료화된 세상에 떨어지고도 한동안 유지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네가 죽었다.

 

정말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우리는 평소처럼 시나리오를 클리어하기 위하여 싸우고 있었고, 일행들 모두 한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순조로운 진행에 약간씩 기분이 좋아져 있기도 했다. 그렇다고 우리가 방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언제고 우리는 치열하게 살았으니까. 그렇기에 더 이상한 일이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내 기억에도, ‘멸살법’속에도 그 시나리오에서 유중혁이 사망할 만큼의 변수는 존재하지 않았었다. 어떻게 된 일이었지? 나는 갑자기 치밀어 오르는 두통에 머리를 쥐었다. 어떻게 된 일이더라….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 날 이후로 익숙하게 겪고 있는 상황이었다. 나는 다시 한숨을 내쉬며 생각하기를 포기하였다.

 

나는 다시 조금 시무룩한 얼굴이 되었다. 너를 떠올릴 때마다 자연스럽게 나오는 표정이었다. 찬란했던 네 마지막을 떠올린다. 빛으로 화하여 흩날리던 네 모습을 떠올린다. 반짝이는 빛들이 허공에 뿌려지자 그 모습이 마치 우리가 지독히도 증오하던 별들과도 같아, 나는 네 저주받은 운명에 원통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지. 너는 어쩌다 그렇게 되었을까. 다른 누구라도 네가 우리 중 가장 먼저 죽음을 맞이하게 될지 몰랐을 것이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어떤 물리적 공격이 네 목을 노렸다 하더라도 너는 가뿐히 죽음을 비껴갈 것이라 나는 믿었었다. 물론 네가 한없이 무모하게 죽음으로 뛰어들었던 수많은 순간들이 존재했지만, 적어도 죽음이 네게 들이닥칠 일은 없을 거라 나는 믿었다. 단 한 순간도 네가 정말로 죽을 거라 생각한 적이 없다. 이 안일함. 어리석은 안일함. 하지만 어쩌겠나. 이미 지나간 일인 것을.

 

네가 아무리 강한 인간이었다 해도, 너는 인간이었다. 그토록 강건해 보이던 네가 이토록 허망하게 아스러질 줄 누가 알았을까. 기분이 곤두박질치는 것 같았다. 너를 생각할수록 그런 마음이 들었다. 일종의 죄책감이라면 죄책감이겠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 법한, 살아남은 사람들의 부채감. 다시 고개를 숙였다. 땅에 닿을 것처럼 계속 고개를 숙였다. 결국 이마가 바닥에 닿고서야 나는 멈춰 섰다.

 

너는 달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뒤를 지키고 서있던 별에 가까울까. 이 세계를 수놓은 지긋지긋한 별들이 아니라, 네 기억 속에도 어렴풋하게 남겨져 있을 진짜 하늘의 진짜 별들 말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너는 어느 한 순간 땅을 향해 곤두박질쳐 하늘에서 자취를 감춰버릴 수 있는 별이었다. 그럼에도 하늘에는 남은 별이 많기에, 뭇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너무도 빨리 잊히고야 마는 안타까운 별이었다.

 

▾▾▾

 

“또 무슨 멍청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소리가 난 쪽으로 시선을 옮기자 좁은 동굴 입구를 손으로 짚으며 들어오는 유중혁이 보였다. 아. 깜짝이야. 놀란 얼굴을 갈무리하며 네게 가벼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 것도. 그나저나 벌써 끝났네?”

“이 정도 소재앙에 시간을 허비하면 그야 말로 재앙이겠지. 그러는 네놈도 벌써 들어와 있지 않나.”

 

너는 살짝 눈가를 찌푸리더니 이내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런 너를 보며 한껏 미소지어 보였다. 정리해둔 옆자리를 손으로 팡팡 내리치며 너를 재촉하기도 했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며 너는 다시 인상을 구겼지만, 곧 군말 없이 내가 가리킨 자리에 가 앉았다. 너 들어오면 따뜻하라고 불도 켜뒀어. 잘했지? 물으며 네게 가까이 다가가자, 너는 네 머리를 손으로 밀며 답한다. 그래. 나는 다시 웃는다. 조용히 울리는 웃음소리에 네 인상이 다시 찌푸려진다. 어찌 펴지는 날이 없는 것 같다.

 

나는 그대로 드러누워 버렸다. 옆에서 어이없다는 듯 내 모습을 바라보는 유중혁의 시선이 느껴졌으나 모르는 척 눈을 감았다. 고집스럽게 눈을 뜨지 않자 곧 네 시선이 거두어졌다. 그제야 나는 슬그머니 한 쪽 눈을 뜨고 너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유중혁의 얼굴을 마음 놓고 감상할 수 있었지. 여전히 차가운 인상에 감탄이 나올 만큼 잘생긴 얼굴이었다. 검은 머리카락, 어두운 눈동자에 이젠 네 일부인 것처럼 보이는 검은 옷, 검은 코트. 너는 내가 기억하는 모습에서 한 치의 변화도 없었다. 아, 한 가지 달라진 게 있다면 내 모든 행동에 좀 더 관용적으로 변한 네 태도뿐일까. 정말 아주 조금이지만.

 

“오늘은 나가지 않는 건가?”

“너 방금 들어왔잖아. 조금 쉬어야지 않겠어?”

“쓸데없는 걸 신경써주는군.”

“괜찮으면 지금 나가자. 일찍 들어와서 쉬는 게 좋겠다.”

 

우리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나는 빙글빙글 웃으며 네 손을 잡았다. 쯧. 가볍게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너는 나를 뿌리치고 먼저 떠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으니까. 입구를 가리고 있던 짐들을 대충 발로 밀어두고 우리는 함께 밖으로 나섰다.

 

의외로 바람은 꽤 따뜻했다. 벌써 봄이던가. 나는 중얼거리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계절에 걸맞게도 밤은 아직 길었다. 그 사실이 기분을 들뜨게 만들었다. 자정을 갓 넘어서는 시간에 걸린 하늘은 칠흑처럼 검었다. 덕분에 달은 평소보다도 밝은 빛을 비추어 주었다. 우리는 환한 밤길을 함께 걸었다. 손을 마주잡고, 평범하며 일상적인 대화를 함께 나누었다. 어느 순간 버릇처럼 생겨버린 일과였다. 나는 행복했다. 다시 너를 마주할 수 있었으니까. 네 생에서 차마 시작하지 못했던 고백을 이제라도 전해줄 수 있었으니까. 나는 행복했다. 비록 이것이 거짓뿐인 행복이라 할지라도.

 

나는 알고 있었다. 네가 현실이 아니라는 걸.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지금 너의 존재 자체가 내 환상인데.

 

아쉬움인지 슬픔인지, 확정할 수 없는 감정으로 뒤섞여 나는 네가 없는 시간을 단 한 순간도 온전히 살지 못했었다. 쏟아지는 별들의 목소리와, 그럼에도 살아가야 한다는 듯 울려 퍼지던 도깨비의 말들을 삼키며 나는 점점 무너지는 걸 느꼈다. 어딘가 뒤틀려버린 정신은 끝없이 너를 찾고, 잡으려 애썼지. 그건 광적인 집착과도 같았다. 그렇게 힘없이 움직이며 의식과 무의식의 시간만을 반복하던 나에게 어느 날 갑자기 선물처럼 네가 나타났다. 이젠 누구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내 방 문을 벌컥 열고 한심하다는 표정을 얼굴 위로 덧그리며 나타난 유중혁. 네 모습을 처음 봤을 때 나는 네가 죽지 않았던 것인 줄만 알았다.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지만, 감정적으로 궁지에 몰려 있었던 탓일까. 나는 찰나의 기적에 희망을 걸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럴까. 나는 반가운 마음이 가장 먼저 고개를 들이 밀었고, 너를 향해 환한 웃음을 지었던 것도 같다. 그런 나를 보며 너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었지. 마치 내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것처럼.

 

‘죽은 사람을 보고도 놀라질 않는군. 아니면 외면하고 있는 건가?’

 

그 말의 끝에는 미약한 안타까움도 섞여 있는 것 같아 나는 할 말을 잃었었다.

 

그 길로 나는 일행들에게 시나리오의 개별 진행을 제안했었다. 어차피 당분간은 반드시 함께 진행해야 할 시나리오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이렇게 개별적으로 시나리오를 클리어했던 경험은 과거에도 있었으니까. 내 눈치를 조금씩 살피던 일행들은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하였다. 나는 조용히 대답을 기다렸다. 선택은 내 몫이 아니었다.

 

‘그렇게 해요. 그리 길게는 무리겠지만. 당장은 괜찮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 제안을 한 거겠죠.’

 

정희원이 말했다. 뜻밖의 인물에게서 정말 예상치 못한 답이 나오자 나는 약간 당황하기도 했었다. 그 말을 시작으로 다른 일행들도 거의 모두 내 의견에 동의했다. 한수영만 빼고. 달리 동의도, 반대도 하지 않았지만 한수영은 눈빛으로 내게 해명을 요구하고 있었다. 나는 고집스레 그 시선을 무시하며 일행들에게 앞으로 있을 크고 작은 사건들을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그 날 이후부터 나는 유중혁과 함께 다니게 되었다. 네가 환상이면 어떠랴. 나는 다시 돌아온 너를, 너와 함께 할 수 있는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는데. 그 생각뿐이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기회를 처음처럼 버려버리고 싶지 않았다. 너를 향한 다짐들을 새롭게 되뇌었다. 다시는 입 밖에도 내보지 못한 채 허망하게 빼앗기지 않겠다고. 그렇게 다짐하고도 어차피 이룰 수 없는 목표라는 사실에 절망했던 순간까지 모두 떠올렸다. 너를 잡고 싶었다. 어디도 가지 못하게 붙들고 너와 함께 살고 싶었다. 거짓 하나 없는 마음으로 네게 고백하기도 했다. 이 마음이 사랑이 아닐 리 없다. 중혁아. 우리 이제는 사랑을 하자.

 

너는 생각보다 쉽게 나를 받아들였다. 물론 티가 나게 찌푸려진 표정이나,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그리 유쾌하지 않은 네 기분을 짐작할 수 있긴 했지만. 그러나 그 표정도 경멸이나 질색은 아니었다. 다행히 연민이나 동정의 기색도 아니었지. 내가 만들어낸 환영이라 그런 걸까. 너를 원하는 마음과 나를 원하길 바라는 마음이 영사기마냥 너에게 투영되어 있는 걸까. 단순한 의문이 일어 네게 물어본 적도 있었다. 중혁아. 너는 왜 내 고백을 받아준 거야?

 

‘무슨 뜬금없는 소리지.’

‘그냥. 갑자기 궁금해져서. 너 나를 좋아하지 않았잖아?’

 

그 말에 유중혁의 표정이 한없이 날카로워졌었지. 얼굴과 달리 너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었다.

 

‘네가 말했으니까.’

 

응? 되묻는 목소리에 유중혁이 답했다. 김독자. 네가 사랑을 하자 했지 않나. 그 대답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고 너를 바라보았지. 약간 허망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조금 침울한 표정으로 다시 네게 물었었다.

 

‘역시 그런 건가. 그럼 내가 말하지 않았다면 지금 이 관계도 없었겠네.’

‘알았다면 말하지 않았을 건가?’

‘그건…. 그건 아니지만.’

 

민망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벅벅 긁자 유중혁이 나를 보곤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후. 숨소리가 깊게 울려 퍼졌다.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너를 바라보자, 너는 다시 말했지.

 

‘너는 내가 가짜라고 생각하나 보지.’

‘뭐?’

‘내가, 네가 만들어낸 가짜일 뿐이라 생각한단 말이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머리가 멍해졌었다. 너는 죽은 사람,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네가 내 앞에 존재하는데 이게 환상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너는 실재하는가? 그렇다면 너는 진짜 유중혁인가? 혼란스러운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그럴 리는 없다. 너는 회귀했고, 네 입으로 너의 사망을 확인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네가 진짜 유중혁이라면 우리가 사랑을 했을 리 없다.

 

하지만 너는 내가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주체적으로 생각 할 수 있었고 너만의 의견을 주장했으며 가끔, 아니 사실 꽤 자주 내 말에 반박하기도 했다. 너는 통보와 합의를 거쳐 나와 떨어져 개별 활동을 하기도 했다. 오늘처럼, 우리는 종종 따로 시나리오를 클리어하거나 히든피스를 찾으러 가곤 했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던 내 마음이 삽시간에 혼란스러워졌다. 너는 내가 만든 환상인데, 내 생각대로만 움직이지 않았다. 얼마나 모순된 말이냐. 내가 만든 피조물이라면 응당 내 의지로 움직여야 하지 않나? 너는 내 환상이 분명한데, 아니 네가 정말 내 환상이 맞을까? 내가 너를 만들어냈다는 생각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었다. 너라는 존재의 근원부터 의문이 일기 시작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혼란스러운 생각들은 숨기고 물끄러미 너의 눈을 바라보다 나는 말했다. 그러게. 너 말고 이 세상에 유중혁이 또 어디 있을까. 정답이었을까. 네 눈이 미소 지었다. 나도 작게 웃으며 너의 손을 잡았다. 내 손 안에 잡힌 너의 손을 가만히 쓸어보다 생각했다. 따뜻하네. 네 손.

 

부여잡으면 붙잡히는 환상이라니. 어떻게 네가 환상일 뿐이라 생각할 수 있을까. 너는 환상이었지만 환상이 아니었고, 실재했지만 실제가 아니었다.

 

환상이라.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내 모습을 보고 세상 모두가 나를 어리석다 손가락질해도 이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내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은, 그곳이 나락이라 할지라도 유중혁을 끌어안고 떨어지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이 너무도 행복하니까, 너를 다시 보내줄 생각이 없다. 이 선택에 후회도 없고. 나는 영원히 이 곳에 살 테다.

 

인간이란 참 모순적인 존재지.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계속 불안했다. 네가 내 환상이라면, 또는 누군가의 환영이라면, 내 의지나 그 누군가의 의지로라도 나타날 때처럼 어느 순간 홀연히 사라져 버리지 않을까. 내가 가장 흔들릴 때 나타난 너였으니 너로 인해 가장 행복해질 즈음 사라지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초조하고 조급한 마음으로 나는 묵묵히 내 곁에 서 있는 너에게 입을 열었다.

 

“중혁아.”

 

형편없이 흔들리는 목소리가 네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한참,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채로 입을 연 자의 최후였다. 나는 무엇을 말해야하나 한참 고민했다. 이러다 네가 화를 내며 대답을 거부하지 않을까 걱정될 만큼. 너 갑자기 사라지지 않을 거지? 너 어딘가로 혼자 떠나지 않을 거지? 유중혁. 너, 내 곁에 영원히 살아줄 수 있지..?

 

입을 꾹 다면 나를 바라보다 결국 유중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네가 뭘 걱정하는지 안다.”

“뭐?”

“내가 말해줄 수 있는 사실은 제한적이지만…. 그래. 한 가지 확실한 건 말할 수 있지. 내가 갑자기 사라지게 된다면, 그 순간은 네가 더 이상 나를 필요로 하지 않을 때뿐이다.”

 

환상이란 네 마음에 달려 있는 문제니까. 필터링 없이 내 귓가로 들어온 그 말에 나는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너를 바라봤다. 너는 그 이상은 허락되지 않았다는 듯 입을 닫고 나를 마주보았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구름이 달을 가렸다. 어둠이 주변으로 내려앉았다. 나는 웃었고, 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럼 너는 평생 나와 함께 하겠네.”

 

구름이 달을 비껴갔다. 확연히 맑아진 하늘에 네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너도 조금은 웃고 있었다. 불안해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에 쫒기는 듯한 표정도 없었다. 나에게 어떤 것을 숨기는 기색조차도.

 

“다행이야.”

 

이 행복을 버리지 않아도 되어서. 그리고 나는 다시 한 번 다짐했다. 역시 나는 이곳에 있어야겠다. 그게 유중혁, 너를 향한 내 사랑이니까.

 

한참을 걷다보니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많이 부서지고 망가져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우리는 동시에 생각했다. 아. 그곳이네. 우리의 처음이 시작되었던 곳. 우리가 처음으로 함께 지났던 길. 나는 너를 도발했고, 너는 나를 다리 아래로 집어 던졌었지. 이렇게 말하니 그리 좋지 못한 추억인 것도 같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곳이 우리의 신뢰가 시작된 장소였다. 그 생각에 다시 소리 없는 웃음이 터졌다. 이젠 이런 것도 반갑네.

 

“오랜만이다.”

“그렇군.”

 

대충 고개를 끄덕이는 네 모습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때만 해도 우리가 이런 모습으로 다시 여기에 오게 될 줄 몰랐는데 말이야. 한참을 추억에 젖은 눈으로 부서진 다리만 보고 있자 유중혁이 인상을 찌푸렸다. 상념에 빠진 내가 못마땅한 건지 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너를 향해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보고 싶었어.”

 

툭 터져 나온 말에 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밤하늘 아래는 신비한 힘이 있다. 숨겨둔 마음도 솔직하게 뱉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었다.

 

“미안한 게 많았지. 서툴렀던 것도 사실이고. 그래도….”

 

바람이 불었다. 이제는 먼지투성이인 도심 한복판에 시원한 공기가 감돌았다. 아쉽게도 봄에 걸맞은 꽃바람은 없었다. 멸망한 세계에 바라기도 민망했지만.

 

“그래도 중혁아. 나는 사랑을 했지?”

 

너와 나 누구도 웃지 않았다. 함부로 입을 열지도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우리는 마주보며 서있었다. 내 목소리가 텅 빈 공간을 돌고 돌아 다시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사랑을 했지? 중혁아. 그게 사랑이었던 게 맞지.

 

네가 있어 좋다. 너와 사랑해서 좋다. 언제까지나 함께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다시는 너를 잃지 않을 거라 다짐한다. 너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미소 짓다가, 나는 여즉 잡고 있던 네 손을 들어올렸다.

 

“뭘 하려는 건가.”

“선물.”

 

네 눈가가 움찔거렸다. 나는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었다. 다시 조용히 눈을 감고, 살짝 고개를 숙여 네 손등에 입 맞췄다. 가볍게 닿은 입술은 꽤 오래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네 손이 아주 약하게 떨렸던 것을 알았다. 나는 입술을 때고 고개를 들어 네 눈을 바라봤다.

 

“이제 곧 메인 시나리오로 돌아가야 해.”

“안다.”

“돌아가더라도 나는 너와 함께할 거야.”

“그래.”

“내가 네 이름을 부르면 대답해 줘야 해.”

“당연한 소리를 하는 군.”

 

바람이 다시 불었다. 달빛은 밝았고 봄바람은 시원했으며 그 바람결에 날리는 머리칼이 부드러웠다. 하늘에는 달이 반짝이는, 말 그대로 완벽한 밤 산책이었다. 나는 너를 보며 웃었다. 거짓말처럼. 그래, 거짓말처럼.

 

이 환상적인 연애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너는 내 곁에 영원히 살 테니까.

 

▾▾▾

 

자리에 누운 나는 옆으로 몸을 돌려 네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미 잠이든 것인지 시간이 흘러도 너는 눈을 뜨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감은 네 눈과 곧게 뻗은 코와 다물린 입술, 하늘을 보며 누운 탓에 아래로 쏟아지는 머리카락을 아무런 제약 없이 감상할 수 있었다. 아, 나도 잠이 오네. 미소를 지은 얼굴로 눈을 감았다. 온통 캄캄한 어둠 속에 시야가 잠식당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자, 조금 더 예민해진 청각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귀를 움직였다. 잠시 뒤척였나보지. 태연한 마음으로 잠을 청했다. 의식이 저 편으로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잠 든귓가 로 날 카로 운알림 음 이울려 퍼 졌다.

 

[전용스킬 ‘제 4의 벽’이 이야기를 종료합니다.]

손등 키스
존경과 애정. '당신과 헤어지기 싫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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