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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逆說)
[당신은 불가능한 업적을 달성하였습니다.]
무언가 결핍된 채 도달한 세상의 끝자락.
크고 작은 상처에서 나온 핏물이 옷자락을 적셨다.
[설화, ‘세상의 끝을 걷는 자’가 탄생하였습니다..]
끝을 보겠다는 일념, 그 하나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피는 점차 멎었고, 그와 함께 내 주변은 암흑으로 가득해져 갔다.
[남은 시나리오가 없습니다.]
나는 결핍된 세상을 ‘끝’을 걸었다.
[8612 행성계의 유료화가 종료됩니다.]
[최종 시나리오의 정산 보상으로 ‘창세’를 획득하였습니다.]
[추가 선택 보상이 존재합니다.]
[당신은 최종 시나리오의 최대 공헌자입니다.]
[당신의 특성에 따라 선택지가 생성됩니다.]
[당신의 선택에 따라 8612 행성계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창세] – 8612 행성계 외 별개의 행성계 창조
[멸망] – 모든 재앙의 동시다발적 재강림, 8612 행성계 파괴
[존재 소멸] – 8612 행성계의 기억, 흔적 및 존재 소멸
[현실] - 8612 내에서 진행된 시나리오 반영, 해당 행성계의 현실로의 전환
[구원] – 8612 행성계의 소생, 모든 생명체에 영생 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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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끝’에서 바라본 새로운 시작은 선택지의 꼬리를 물고 늘어져서 제 꼬리를 숨겼다. 분명 선택지의 더러운 끝을 숨기려는 것이리라. 시나리오의 엔딩 크레딧이 내 눈앞에 나타나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선택지의 하나를 ‘선택’하는 것뿐이었다.
“끝까지 놀아난다 이거지…”
기분은 참담했지만 개중에서도 원하는 엔딩을 골라야만 했다.
[창세]를 선택할까 고민하던 그는 이내 생각을 고쳤다. 꽤 오랜 시간에 걸쳐 고민하던 그는 선택지 하나를 골랐고, 변화를 기다리는 한 사람으로서 눈을 감았다.
[당신은 ■■를 선택하였습니다.]
[선택지에 따라 8612 행성계가 재구성됩니다.]
그의 주위를 둘러싸던 공간이 조각나기 시작했다. 암흑이 사라지고 나타난 것은 어딘가 공허해 보이는 흰색. 그 흰색의 연속 속에 홀로 서있던 그 또한 함께 물들었다.
그래.
[창세]는 내가 아니라…
그가 생각을 마무리하기도 전에 주변의 모든 곳이 백색으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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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대한 양의 데이터로 인하여 정산이 지연됩니다.]
[10일 동안 ‘■■■■’이 성립합니다.]
[10일 후, 시나리오는 소멸합니다.]
시나리오와 스타 스트림이 전달하는 최종 메시지를 그가 확인하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이 이야기는 성립하지 않았을 것이다.
역설(逆說)
— 헤아릴 수 없는, 명확하기 이를 데 없는.
분명 태양은 제 나름대로 타오르고 있음이 분명했지만, 열기가 그들이 있는 곳까지 닿기에는 조금 먼 듯싶었다.
“—아.”
찰싹.
“중혁아.”
찰싹찰싹.
“중혁아 죽었니?”
그곳에서는 누군가가 유중혁을 부르고 있었고 그의 이름이 나온 뒤에는 꼭 가벼운 마찰음이 뒤따랐다.
“죽여버린다, 김독자.”
자신의 뺨을 가볍게 때리고 있던 손을 낚아채며 유중혁은 눈을 떴다. 그는 자신이 눈을 감고 있었던 시간을 가늠하려 잠든 시각을 되짚어갔다.
모두가 잠들고 김독자와 함께 다음 시나리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기억.
계획 구상 중 스스로 미끼가 되겠다던 김독자를 보며 검을 향해 손을 뻗던 기억.
그 뒤로 순조롭게 계획을 세운 후 김독자는 잠을 청했고, 자신은 잠시 주변을 둘러보러 나갔다.
그 다음은?
혼란스러운 표정의 유중혁을 본 김독자가 입을 열었다.
“너도 기억이 안나면 어떡하냐, 중혁아. 나도 정신 차리고 보니까 여긴데.”
여기?
유중혁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폐허’의 정도를 지나 누가 짓이겨 버린 꼴이었던 서울이 이젠 폐허, 그 정도는 되어 보였다. 게다가 아득히 먼 가장자리에서부터 묘하게 복구되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빌딩을 바라보며, 유중혁은 대체 이 상황과 장소를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의문이 들었다.
“여기가 어디지.”
“서울.”
“정말 내가 그걸 몰라서 묻는 줄 아는 건가? 네 놈의 머리는 대체…”
“아, 그 공백 뭔데?!”
유중혁은 울컥하는 김독자를 가볍게 무시했다.
“여긴 서울이고, 시나리오의 중간쯤 인 것 같아.”
“시나리오의 중간이라고?”
유중혁은 천연덕스럽게 답하는 김독자의 얼굴을 한 번, 그 뒤의 기이한 서울을 한 번, 다시 김독자의 얼굴에 초점을 맞추며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검을 향해 뻗어 나가는 손을 본 김독자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뭐 하려고?”
“네가 진짜 김독자인 것과 지금 내가 보는 것이 환영이 아님을 증명해라.”
“…”
김독자는 목 끝에 겨눠진 칼날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걸로 죽을 수는 있나?
그의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생각의 답은 부정이었다.
“그럼 죽여 보던가. 여긴 시공간의 틈새 같은 곳이니까.”
“뭐?”
정확히 김독자의 목 한가운데를 겨냥한 채, 유중혁은 김독자의 대답을 종용했다.
“대략 10일쯤 갇혀 있어야 하는 곳 같아. 스킬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으니 대응책도 찾을 수 없고. 아마 예전에 갇혔던 곳과 비슷한 거 같은데?”
“그 사실은 어떻게 알았나?”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게, 제한시간을 확인하는 것 밖에는 없으니까.”
잠시 침묵하던 유중혁은 검을 내리고 김독자 곁에 주저앉았다.
“이렇게 빨리 포기할 줄은 몰랐는데.”
“전에도 이런 상황이 있었으니 믿는 것 뿐이다.”
“’유중혁이 유일하게 믿는 김독자’라서 가 아니고?”
이 상황에서도 웃음이 나오는가 보군.
유중혁은 싱글싱글 웃고 있는 김독자의 얼굴을 힐끗 보고는 눈을 돌려 버렸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김독자, 한수영과 함께 갇혀본 적 있는 이런 공간은 제한시간을 줄일 수도, 공간 자체를 찢을 수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그들은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중혁아, 밥이나 먹을까?”
“여긴 안 먹어도 되지 않나.”
“그냥, 네가 해준 건 맛있잖아.”
“대체…”
질린다는 마음을 가득 담아 김독자를 본 유중혁은 침묵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서 기다려라.”
“역시 날 위해 주는 건 중혁이 밖에 없다!”
김독자의 말을 흘려들은 유중혁은 아수라장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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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중혁이 보이지 않게 되자 김독자는 작게 유중혁을 불렀다.
“중혁아.”
“…”
메아리조차 돌아오지 않을 만큼 근처에는 높은 건축물이나 산이라 할 법한 것이 없었다.
“유중혁.”
“…”
“개복치 해삼 말미잘 못 생…기진 않은 중혁아.”
“…”
여전히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김독자는 유중혁과의 거리를 가늠하며 천천히 일어섰다.
곧이어 그의 등에 난 것은 칠흑 같은 날개였고, 어느새 돋아난 뿔 또한 그의 머리 위에 자리잡았다.
앞으로 10분.
시간을 확인한 김독자는 그대로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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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 게 남아 있을 리가 있나.
건물 터를 헤집던 유중혁은 신경질적으로 손을 털었다. 걷는 대로 끝까지 나가 자니 너무 먼 듯싶었다.
애초에 왜 알겠다고 해서.
스스로 던진 질문이었지만 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가 김독자를 동호대교에서 떨어뜨릴 때부터 나와있던 답이었다. 김독자를 다리 아래로 던지던 순간 유중혁 자신이 지었던 표정.
『 유중혁은 무엇이 그리 기쁜지, 눈부실 정도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
…젠장.
그것은 분명 예언자를 찾았다는 착각에서 기인한 표정임에 틀림없었지만 그 내면에는 다른 이유 또한 그가 미소를 짓는 데에 기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중혁은 지나치게 정확히 맞아 떨어지는 우연을 믿지 않는 편에 가까웠다. 그런 그에게 김독자가 설명했던 당시의 상황은 충분히 의심할 만한 것이었기에 그는 김독자를 죽이고자 했었다.
그때 김독자의 뒷말을 듣지 않고 죽였더라면 지금 유중혁에게 일어난 변화 또한 없었던 것이 될 일이었다.
정처없이 걷던 유중혁은 한 순간 걸음을 멈추고 몸을 숨겼다. 뒤쪽에서 날개가 퍼덕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유중혁을 향해서 꽤 낮고 느리게 날고 있었다. 던질 만한 것을 찾던 그는 결국 지니고 있던 검을 손에 쥐었다. 주변에 들리는 소리는 저 날개 짓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죽인다.
애초에 김독자와 자신 외에는 이곳에 존재하는 ‘사람’은 없으며, 김독자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날 수 없는 상태이다.
20m.
그는 눈을 감고, 자신이 평범했던 사람으로 돌아갔음을 스스로 상기시키며 어느 정도의 힘을 가해야 할지 가늠했다.
유중혁은 그가 게임 내에서도, 현실에서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10m.
‘에임 실화냐?’
바로 지금.
유중혁은 있는 힘껏 검을 던졌다.
푹.
날아오던 무엇인가에 그의 칼이 깊게 꽂히며 추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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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독자는 서울이 한 눈에 보일 때까지 수직으로 날아올랐다. 곳곳이 녹슬고 부식되었음에도 여전히 높은 위치를 선점하고 있는 63 빌딩을 중심으로 하여 원형으로 복구되고 있는 서울은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김독자는 유중혁에게 스킬이 사용되지 않는다고 거짓말을 했다. 10일 동안 갇혀 있어야 한다고 진실을 말했다. 다만, ‘시나리오’가 아닐 뿐이었다.
뭐 어때.
이제 유중혁은 ‘거짓간파’를 쓸 수 없을 테니 거리낄 것은 하나도 없었다.
한 가지 더 추가하자면, 스킬을 사용할 수 없다는 김독자의 말은 완전한 거짓은 아니었다.
[절대악(絕對惡) 전용 스킬, ‘생명탐지’를 발동합니다!]
김독자만 예외였다.
[‘서울’내의 모든 생명체를 표시합니다.]
“인간 제외.”
[‘인간’을 제외합니다.]
오직 김독자만이 스킬을 사용할 수 있었고, 오직 그 만이 ‘마왕’으로서 서울에 남았다.
“일단 ‘조류’만 표시.”
[‘조류’만 표시합니다.]
[43종류의 생명체가 있습니다.]
창공에서만 바라볼 수 있는 생명체의 표시가 서울 곳곳에서 나타났다.
[총 2987 개체가 있습니다.]
[총 2986 개체가 있습니다.]
[‘큰고니’의 개체 수가 3으로 감소합니다.]
[■■■■이 성립함에 따라, 당신에게 선택권이 생성됩니다.]
…
…?
갑작스러운 개체 수의 번복. 김독자는 바뀐 숫자를 응시했다.
서울에 큰고니가 왜 있지? ■■의 결과 중 하나인가?
김독자는 서울 위로 뜨는 표식들을 분류했다. 개체 수에 따라 차례대로 정리하니 방금 죽은 듯한 조류 종의 목록이 극초반에 위치하고 있었다. 앞쪽의 목록을 살피던 김독자는 일순 의문이 들었다.
지금 서울에 큰고니를 잡을 수 있는 개체가 몇이나 되지?
저 정도 크기인 개체가 생존해 있다는 사실조차 놀라운 데, 큰고니를 사냥할 수 있을 정도의 크기를 가진 생명체는 극히 드물 터였다.
김독자는 시간을 확인했다.
“시발.”
시간은 어느새 그가 목표로 잡았던 10분을 넘어서고 있었다.
벌써, 여기서 벌써 들키면 안된다.
가공할 속도로 하강하던 김독자의 눈에, 자신이 기다리던 곳에 이미 도착한 유중혁의 모습이 보였다. 유중혁이 도착한 이상, 김독자는 가만히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연기를 할 수 없었다.
조금만 더 가까워진다면, 유중혁은 김독자를 발견할 것이다.
김독자는 급하게 방향을 바꾸어 유중혁으로부터 멀리 벗어났다. 외딴 곳에서 다시 인간의 형상으로 돌아온 그는 터벅터벅 자신이 출발했던 곳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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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걸었을까.
김독자가 걷고 있던 방향에서 움직이는 형상이 보였다. 가로막고 있는 건축물 하나 없는 하늘은 티없이 맑았다. 비록 열기를 품지 못하는 태양이었지만 그 빛만은 찬란했고, 그 빛은 김독자와 그 반대편의 형체를 여과없이 비추었다. 김독자를 향해 걸어오는 인영은 조금은 화가 난 것처럼 보였지만,
빛이 났다.
“김독자! 기다리고 있으라 하지 않았나!”
가까워지는 그 짧은 순간을 못 참아서 내지르는 소리에 김독자는 그저 웃으면서 시선을 돌릴 뿐이었다. 유중혁은 태양이 비춰서 빛나는 것이 아니었다. 유중혁이란 김독자에게 태양 그 자체였다.
“그새를 못 참고 돌아다니다니. 네 놈은 대체 말을 듣기는 하는 건가?”
중혁아.
주인공인 네가 태양이라면, 난.
“그렇게 마음대로 돌아다닐 거면 가는 곳이라도 알려주는 게 맞는 거다!”
성큼성큼 걷던 유중혁은 김독자의 얼굴 표정이 보일 때쯤, 자리에 멈춰 섰다.
“내가 못 찾으면…!”
곳곳이 움푹 패였지만 그래도 덜 파인 곳을 드러내며 살아가는, 달 정도로 할까.
유중혁은 여전히 그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 희멀건 사람을 보며 굳게 입을 닫았다.
“중혁아.”
달은 어둠이 있어서 필요한 거야.
“내가 널 찾으면 돼.”
하지만 어둠은 태양에 반하는 것이니, 내가 없애 줄게.
김독자를 죽일 듯 노려보고 있던 유중혁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를 향해 한 발 한 발 내딛은 것은 김독자였다. 마침내 유중혁 앞에 선 김독자는 그대로 유중혁의 얼굴 가까이 자신의 얼굴을 밀착했다. 부드럽게 맞닿은 입술이었지만, 부르튼 입술은 서로에게 고통을 주었다. 둘 사이에 존재하는 공간이 없기에 발생한 마찰열. 그럼에도 점차 멀어져 가는 고통에 아쉬움이 남는 것은, 분명 고통을 가장한 무엇이 그들 사이에 존재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김독자는 유중혁의 입술을 가볍게 쓸었다. 유중혁의 얼굴을 바라보던 그는 다시 얼굴을 기울였다.
“내가 널 포기 할리가 없잖아.”
“…놓아준다고 하지 않았다.”
김독자는 유중혁을 사랑했다. 그리고 그는 이제 유중혁을 위해서, 유중혁을 ‘사랑했었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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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허한 서울을 메우려는 듯, 뚜렷한 목소리가 울렸다.
“행동강령 하나.”
“하나!”
“자신이 싸지른 말은 스스로 지킨다.”
“…지킨다!”
“다시 하나.”
“하나!”
“이동할 때는 행선지를 밝힌다.”
“밝…”
‘차렷’ 자세로 유중혁이 하는 말을 복창하던 김독자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 중혁아… 굳이? 위험한 것도 아닌데…”
“…”
“…요?”
시선은 김독자를 향해 고정한 채로, 유중혁은 자신이 한 손에 쥐고 있던 새의 목을 양 손으로 잡았다.
꾸드득.
그의 손에 의해 처참히 돌아가는 새의 목을 보며 김독자는 침을 삼켰다.
시바 저건 분명 경고다. 대답 안 하면 저 꼴 난다고 말하는 거다. 쟤 한다면 하는데, 에이 설마 나를, 근데 하는 거 보면 나를 저렇게 만들 거 같기도 한데, 시바 시바 시바 시바 시시시시바 신, 아니, 아니…
김독자는 눈치없이 나대는 자신의 의식의 흐름을 제어하기 위해 입 안쪽의 살을 지그시 짓눌렀다. 덕분에 난잡한 자신의 머릿속은 살짝 진정이 되는 것 같았지만 변함없는 유중혁의 살기는 정확히 김독자를 향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알겠다 할 수도 없고…
눈은 여전히 김독자를 향해 있는 유중혁이 목이 비틀어진 그것의 배를 천천히 갈랐다. 김독자는 곧 자신이 저렇게 낱낱이 파헤쳐 질 것이라는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쳤으나 애써 부정했다. 안쪽의 것들을 분리해내는 유중혁의 모습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었고, 그것을 옆으로 패대기치는 그의 손에서는 선혈이 뚝뚝 묻어나왔다. 눈을 피할 수 없던 김독자는 그런 유중혁의 모습을 지켜보다, 언제나 옳았던 하나의 결론에 다다랐다.
…살인적으로 잘생겼네…
찌르는 듯한 살기에도 불구하고, 김독자는 유중혁의 얼굴에 취해 그의 모습을 쫓는데 여념이 없었다. 신경질적으로 해체 작업을 하던 유중혁은 갑자기 하던 일을 멈추고 바닥에 칼을 내리꽂았다.
“양심이 없군. 원하는 답을 주지도 않는데 내가 왜 이것까지 해야 하는 거지? 그런 놈을 위한 음식은 없다.”
지금 김독자가 하는 말과 태도는 곧 유중혁의 앞에서 사라져 버리겠다는 김독자의 의지이자, 하나의 예정된 미래라고 봐도 무방했다. 유중혁은 김독자의 이런 면을 이해할 수 없었다.
같이 있기를 원해야 하는 게 아닌가?
우선, 김독자의 말은 옳았다.
유중혁과 김독자는 개별 행동을 해도 전혀 지장이 없었으며, 하물며 지금 그들이 갇혀 있는 시나리오 속에서는 그들을 위협할 수 있는 것이 존재할 수 없었다.
‘가공간(假空間)의 틈’
예전에 한수영과 함께 세 명이서 갇혔던 그곳에서, 서로를 제외하고는 위협이 될 만한 것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그들이 느끼는 무능력감과 무료함이 서로를 자극해서 더 큰 위험을 불러일으켰을 뿐이었다. 분명 이를 고려하자면, 지금 이 순간만큼은 김독자의 방랑벽은 지적하지 않는 것이 더 득에 가까웠다. 가만히 앉아있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분명 이성적으로 생각하자면 그래야 하는데, 유중혁은 무언가 불쾌했다.
그의 감정은 분명 닳고 닳았었으나, 김독자를 향한 감정을 자각한 후 조금씩 예전의 ‘감정’을 되찾았었다.
“—유중혁!”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유중혁은 사념에서 벗어났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길래 바로 앞에서 부르는데 못 듣냐?”
“…”
“말하기 싫으면 관둬. 근데 이건 좀 심하다는 생각이 너무 강렬하게 드는데.”
“무엇을 말하는 건가.”
당연한 것을 묻는 다는 듯 김독자는 악을 썼다.
“왜 다 잡아 놓고 요리를 안 해 주냐고!”
그제서야 유중혁은 조금 전까지의 사태를 떠올렸다. 김독자의 오기와 자신이 내뿜던 살기. 그 뒤를 이은 음식 제공 거부 선언과
“벌써 말이 짧군.”
김독자의 어설픈 존대.
“…요.”
웃기지도 않았다.
김독자를 향해 가당 치도 않은 걱정을 하는 자신과, ‘감정’에 대한 변화, 그리고 그에 대한 인지. 이성적으로 끊어내야 하는 더러운 집착의 끈이었다.
자유롭게 살고 싶은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것은 바로 유중혁 본인이었다. 방해하는 것은 무조건 해결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은 끝까지 얻어냈다. 그런데 지금 유중혁을 가로막는 문제는, 그가 몰가치적이라 여기던 감정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해결, 해야 하는 걸까.
그렇다고 유중혁은 김독자의 방랑벽을 그대로 손 놓고 방관하고 싶지도 않았다.
유중혁의 감정은 그를 통제하기 위한 발판을 천천히, 하나씩 밟아 나가는 중이었다.
“…”
“새의 생명은 존엄하다, 중혁아.”
“…”
“…요.”
“하아.”
짧게 한숨을 쉰 유중혁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다시 손질하기 시작했다. 잠시 머뭇거리다 샐쭉 웃으며 자신의 옆에 앉는 김독자를 의식하며, 유중혁은 생각했다.
자신의 감정이 통제하는 ‘그’는 누가 될 것인가.
자신의 손에 의하여, 고기 덩어리가 되어가는 그것. 유중혁은 그것과 자신이 닮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 평생, 아니 수없이 많은 회차를 포식자로서 살아온 그였지만 지금 이 순간은 일개 개인에게 휘둘리고 있는 자신이었기에.
“중혁아, 난 널 그냥 내버려두고 떠나지 않을 거야.”
“…”
“그러니까 내가 어디로 갈 지는 걱정 안 해도 돼. 내가 그렇게 약한 것도 아니고, 지금은 위험한 상황도 아니잖아.”
“…”
“난 너한테 거짓을 말하지 않아.”
행선지의 문제가 아니지 않나, 김독자.
단순히 행선지 때문이 아님을 알고 있으면서도, 김독자는 유중혁의 의도를 숨겨버렸다.
애초에 나를 좀 더 믿어주고.
…그랬더라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했지만 자신의 눈앞에서, 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핏빛 바람이 되어 스러져버리는 김독자였다.
“…불이나 피워라.”
그래도 김독자는 확실히 강하긴 했다. 비록 지금의 그는 일반인이 되었다고 해도, 애초에 위협이 될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에 안심할 수 있었다. 안심해야 했다.
유중혁은 깔끔하게 잘린 고기를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무엇인가 생각날 듯하다 이내 수면 깊은 곳으로 다시금 가라앉았다.
추락, 그리고 추락, 이어지는 추락의 절정.
그곳은 아무것도 없었다고 그는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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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닥타닥.
애매하게 타 들어가는 불 소리에, 먼저 입을 연 것은 김독자였다.
“여기 있는 10일은, 실제로는 얼마나 될까?”
“…저번처럼 10분쯤 되지 않겠나.”
“그래?”
김독자는 유중혁의 대답을 곰곰히 생각하며 제 소리를 내고 있는 모닥불을 쳐다봤다.
“그럼 난 1369일쯤으로 해야겠다.”
“쓸데없이 구체적이군.”
“그러게”
바람에 흔들려, 공중에서 중간중간 끊어진 모닥불이 비웃는 형상을 자아냈고, 김독자는 자신의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허상을 그저 지켜보았다.
“여기서 나가면 어떤 식으로든 시간이 지나 있겠지?”
유중혁은 아무런 말없이 모닥불이 흔들리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각인지, 사람인지. 유중혁의 모습은 정말 사람은 신이 만든 피조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함과 동시에, 만약 신이 자신을 본떠서 사람의 형상을 빚었다면 유중혁을 만든 신은 대체 어떤 외양일까 하는 궁금증이 일게 만들었다.
‘와씨…분위기가…?’
멍하니 있던 김독자는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내가 없어도 울지 마, 중혁아.”
“…그게 무슨 소리냐.”
“내가 없으면…어 중혁아 그거 아니야.. 그거 내려놔, 그 말 아니니까 그거 내려놔.”
“무슨 말.”
“그거 내려놔야 무슨 얘기를 하든 말든 하지. 손에 쥔 거 내려놔, 씁, 빨리.”
“대답해라 김독자.”
유중혁은 손에 들린 검을 그러쥐며 김독자를 향해 몸을 일으켰다.
“아니, 내가 없으면 네가 슬퍼할 거 같고…”
“같고?”
“슬프면 우는 거고…”
“우는 거고?”
“네가 울면…”
“울면?”
김독자는 뒷말을 따라하며 말 한 마디마다 자신을 향해 전진하는 유중혁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망했다.
“유유하고 울거잖아?”
대답과 동시에 몸을 뒤로 돌려 달아나는 김독자였다.
처음부터 도망을 각오하긴 했다. 그러나 앞에 있던 일 때문인지, 김독자는 자신의 예상보다 도화선이 낮게 깔려버린 유중혁의 때이른 반응에 죽을 힘을 다해 뛰었다.
잡히면 반죽음. 정해진 수순에 따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유중혁은 최선을 다해 도망치는 김독자를 황망히 지켜봤다. 또 무슨 소리를 지껄일지 일순 긴장했던 그는 자신이 김독자의 손 안에 놀아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데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사실을 받아들인 후, 그는 잠시 풀어졌던 손아귀에 다시금 힘을 주었다.
“죽여버린다 김독자!!”
“악! 한 번만 봐주자! 중혁아! 한 번만 봐주자!”
뒤를 확인한 김독자는 이젠 태초의 힘까지 끌어내서, 더욱 속도를 높였다. 유중혁은 누구보다도 진지한 눈빛으로 김독자를 쫓고 있었고, 그 속도는 절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속도보다도 김독자에게 더 공포스러웠던 것은
‘미친놈! 칼은 놔두고 와야지!’
유중혁이 손에 꼭 쥐고 있는 그의 애용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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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쳐 자라.”
“…”
“왜 대답이 없지? 쳐야지 잘 건가?”
“와~ 벌써 꿈나라다~”
김독자가 유중혁에게서 달리기로 벗어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얼마 가지 않아 유중혁에게 뒷덜미를 잡혔고, 김독자는 다행히 칼을 맞는 사태만은 피했다.
몇 번 죽을 뻔하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얼마나 빌었는지 김독자의 손바닥은 아직까지 열이 올라 있었다.
이제 유중혁이 잘 때까지 기다리면 되겠네.
이전과 같은 분위기가 지속됐다면 유중혁은 자신이 아주 미세한 소리만 내더라도 잠에서 깨어났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잠을 아예 자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조금이라도 유중혁의 경계를 풀기 위해, 김독자는 도박 아닌 도박을 했다.
간신히 타오르던 불빛이 아스라질 때쯤.
김독자는 처음 누웠던 자세 그대로 살짝 눈만 떴다. 정확히 몇 시간이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2시간은 족히 지난 것이 분명했다. 가만히 눈을 깜빡이며 자신의 주변을 흝는 김독자의 눈은 달빛을 받아 어둠 속에서도 형형히 빛을 발했다. 유중혁은 고른 숨소리를 내뱉고 있었고, 주변은 바람 소리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달과 별이 공존하고 있었다.
행여 옷이 스치는 소리라도 날까 싶어, 김독자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젠장.
오랜 시간 움직이지 않았던 탓에 온몸이 굳어 잘 움직여 지지 않았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난 김독자는 유중혁이 잠을 자고 있는 것이 맞는지 확인한 후 그대로 그에게서 멀어져 갔다. 밤에는 날개 짓조차 할 수 없었다. 밤은 지나치게 고요했기에 그렇게나 큰 소음은 김독자에겐 사치였다. 다만,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조금 더 빨리 걷는 것이 시간을 단축하는 최선의 길이었다. 자박거리는 발소리조차 내지 않으며, 김독자는 그가 원래 있던 곳으로부터 벗어났다.
그리고 유중혁 또한, 눈을 떴다.
무너진 건물 사이로, 김독자의 하얀 코트는 위치 추적기가 따로 필요 없을 정도로 눈에 띄었다. 정확한 방향에, 어딘가 조급한 듯도 보였지만 김독자는 움직일 때 전혀 소리를 내지 않았다. 게다가 한 번씩 자리에 멈춰 서서 가만히 귀를 기울이기도, 뒤를 돌아보기도 했다. 그렇기에 유중혁은 김독자와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며 뒤를 밟을 수밖에 없었다.
분명 김독자는 밤에 가야할 곳은 고사하고 해야 하는 일도 없을 터였다. 당연히 유중혁 자신을 속여야 할 일도 없었다.
유중혁의 내면 기저에 위치한 바다에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리며 파도가 치기 시작했다.
김독자는 유중혁을 속이고 있었다. 자신이 유중혁을 찾겠다 한 말은 결국, 김독자 자신은 사라질 것이라는 전제 하에 성립되는 말이었다.
물론, 유중혁은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김독자의 의중을 낱낱이 파헤치고 싶었다.
다시금 발을 멈춘 김독자에 맞춰, 유중혁은 무너진 시멘트 벽 뒤로 몸을 숨겼다. 시멘트의 텁텁한 냄새에 그는 얼굴을 구겼다. 김독자의 발자국 소리가 다시 들려올 때까지 맡고 있어야 하는 그 냄새가 너무 역했지만 그는 김독자가 시간을 오래 끌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이때까지 그래왔으니까, 유중혁은 기다렸다.
이전보다 길어지는 정적이었지만, 그는 기다렸다.
…?
이상함을 느낄 때까지.
설마 자신을 발견한 걸까, 그래서 시멘트벽 앞에 서서 무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유중혁은 원인 모를 공포감에 휩싸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쫓기듯 돌아본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몸을 일으켜서 오직 공허만이 존재하는 서울을 황망히 바라봤다.
그곳에 김독자는 없었다.
[■■까지 9일 남았습니다.]
[■■■■이 성립함에 따라, 당신의 선택이 ■■에 반영됩니다.]
[9일 동안 ■■■■이 성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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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은 어제와 같았다. 빛을 내지만 열을 내지 못했기에, 새벽녘의 공기를 서늘하다 못해 차가웠다. 식어버린 모닥불 옆에 가만히 앉아 있던 유중혁은 시선을 비틀었다.
김독자는 자는 걸까, 잠을 가장한 걸까.
아무리 조심하더라도 크고 작은 파편으로 덮여 있는 길이었다. 그곳을 어떠한 소리도 내지 않으면서 걸어가는 것이 가능했다면, 김독자는 진작 그렇게 걸었어야 했다. 더 안전하고 확실한 선택지를 놔두고 굳이 위험을 택하는 것은 김독자답지 못했다.
“내가 따라 갈 것을 알고 있었나.”
듣지 못할 질문임을 알고 있었지만, 유중혁은 자신 앞에 누워있는 사람에게 질문했다. 그는 자신이 질문을 하면서도 지나친 억측이라 생각했다. 지금 그들은 일반인이었으며, 평범한 김독자는 그럴 능력이 없었다. 그저 자신의 순간적인 불안과 사념이 김독자의 소리를 놓치게 만든 원인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도달한 유중혁은 다음 질문을 떠올렸다.
왜, 어디를, 몰래 간 거냐, 김독자.
적막과 고요가 기묘하게 어우러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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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독자는 고르고 깊게 숨을 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지금 일어나면 답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직감이 그를 압박했다. 김독자는 숨죽인 채로 유중혁의 생각을 읽기 위해 집중했다.
‘왜, 어디를, 몰래 간 거냐, 김독자.’
덜컥, 떨어지려는 불안을 간신히 부여잡은 것은 유중혁이 아직 김독자가 그를 눈치챘다는 사실에 확신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아직은 괜찮았다. 아직은.
김독자는 자신의 거짓이 유중혁에게 10일 동안의 현실로 남아주기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야 하루가 지났음을 고려해 봤을 때, 벌써부터 자신의 거짓이 의심받는 다는 것은 너무 일렀다.
마치 스틱스 강에 가라앉지 않는 돌다리를 견고하게 설치하지도 않았는데 성급하게 건너오는 유중혁을 마주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를 마주한 김독자의 손에서는, 아직 돌이 치워지지 않았다. 김독자는 유중혁의 상념을 끊기 위해 몸을 천천히 돌렸다.
“…”
그리고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유중혁의 눈과 마주했다.
중혁아, 나 믿지?
“눈 뜨니까 유중혁이 날 보고 있다니, 오늘 계탔네.”
“오늘 들은 첫마디가 헛소리라니, 부정 탔군.”
아무 일 없다는 듯 평소와 같이 건넨 인사에, 유중혁 또한 그대로 화답했다. 그렇게 서로에게 다른 목표가 생긴 2일 차의 날이 밝았다.
김독자는 돌다리를 대충 놓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리고 그 돌다리는 마치 원래 있었던 것인 양, 주어진 순리 그 자체로 받아들여져야만 했다.
그는 자신이 완수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때가, 아니다.
김독자는 자신 위에 군림하고 있는 하늘을 올려 보았다.
거만하기 짝이 없었다. 비도 오지 않고 흙먼지만 날리는 땅에서 바라본 하늘은 지나치게 높았다. 그의 얼굴에 표정은 없었다. 그저 무언가를 열망하고 있었을 뿐.
[■■까지 8일 남았습니다.]
[8일 동안 ■■■■이 성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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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지 7일 남았습니다.]
[7일 동안 ■■■■이 성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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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온도는 매일이 같았지만 김독자에게만은 달랐다. 김독자에게 태양의 온도는 매일 추락하고 있었다. 김독자는 타오르는 태양을 갈망했다.
둘째 날과 셋째 날 밤, 김독자는 자신이 누웠던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정확히는 떠날 수 없었다. 한밤중 가만히 누워있는 유중혁은 얼핏 보면 자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음을, 김독자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지나치게 노골적인 느낌이 그를 찔렀었다.
…잠이나 잘까.
깔쌈하게 포기한 그는 그렇게 이틀 밤을 내리 잤다.
낮 동안 그들은 김독자의 주도 아래 실없는 농담을 하고, 현 시나리오가 끝난 후의 시각을 추리해 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 다음 여러 시나리오를 예측하며 계획을 짜고, 대비했다.
그리고 돌아온 4일 차의 밤, 유중혁은 잠에 빠져들었다. 제 아무리 뛰어나다 할지라도 유중혁 또한 사람이었다. 그가 지쳐 잠든 밤 위로 고요히 날개 치는 소리가 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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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악(絕對惡) 전용 스킬, ‘생명탐지’를 발동합니다!]
[‘서울’내의 모든 생명체를 표시합니다.]
“‘큰고니’만 확인.”
[‘큰고니’ 개체 수: 3]
김독자는 자신 앞에 띄워진 숫자 ‘3’을 응시했다. 자신이 첫날 확인했던 수와 변함이 없었다. 그의 아래에서 붉게 빛나는 생명의 표식 또한 3개였다. 김독자는 손가락으로 표식을 가렸다. 연필 자국을 지우개로 지우듯, 빛을 비벼 끈 뒤 그는 손을 치웠다. 붉은색은 사그라졌다.
[‘큰고니’ 개체 수: 2]
[■■■■이 성립함에 따라, 당신에게 선택권이 생성됩니다.]
[선택권: 1개]
그 뒤를 따르는 메시지를 무시한 채로, 김독자는 남은 2개의 빛도 지웠다. 이렇게 쉬울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빛의 존재는 금방 지워졌다. 너무 쉽고도 간단한 작업이었다.
[‘큰고니’ 개체 수: 0]
[■■■■이 성립함에 따라, 당신에게 선택권이 생성됩니다.]
[선택권: 3개]
[당신은 하나의 종을 멸종시켰습니다.]
[■■■■이 성립함에 따라, 당신에게 대비되는 옵션이 추가로 생성됩니다.]
[옵션: 1개]
생명을 가감없이 치우며 얻은 선택권. 김독자의 선택으로 하나의 종이 멸종되었다. 그렇게 얻은 3개의 선택권과 자신의 선택에 대비되는 옵션 1개. 김독자는 다시 선택했다.
“‘강치’ 소생.”
[옵션 ‘종의 소생’으로 생물 종 독도의 ‘강치’를 소생합니다.]
[옵션: 0개]
“‘강치’에 선택권 3개 사용.”
[‘강치’의 개체 수가 증가합니다.]
[종의 특성에 따라 적용 개체 수가 변화합니다.]
[‘강치’ 개체 수: 2]
[선택권: 0개]
서울에 존재하던 붉은 빛이 사라지고 다시 나타났을 때쯤, 김독자의 선택에 따라 생물의 종은 변화했다. 그에게 이것은 하나의 테스트.
김독자는 ‘등가교환’을 했다.
[■■까지 6일 남았습니다.]
[‘등가교환’이 성립함에 따라, 당신의 선택이 ■■에 반영됩니다.]
[6일 동안 ‘등가교환’이 성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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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은 어제와 같았다.
유중혁은 눈을 깜빡였다. 김독자는 아직 자고 있었다. 어딘가로 갔다가 돌아온 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던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김독자는 결국 이곳으로 돌아올 것이다. 최종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자신이라면, 유중혁은 기다릴 수 있었다.
너무 안일해진 건가.
그는 자신이 바뀌었음을 어렴풋이 인지했다. 과거의 자신이었다면 김독자에게 답을 종용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애초에 첫날 밤, 김독자의 뒤를 쫓는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김독자를 바로 붙잡았을 것이다. 유중혁의 변화 요인은 단 한가지였다.
김독자.
무수한 회차에 처음으로 등장한 존재. 감정이 닳고 닳아 소멸해 갈 때 마주한 터닝포인트. 자신이 개척하던 인생의 주도권이, 김독자에게로 넘어가버렸다. 그리고 지금 이 사태는 과거의 자신에서라면 절대 기대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유중혁은 일종의 두려움을 느꼈다.
“…유중혁?”
언제 깼는지, 초점이 잘 맞지 않는 김독자가 눈을 떴다.
“왜 그러고 있어?”
“무슨 말이지.”
다짜고짜 왜 그러고 있냐니? 유중혁은 자신을 돌아봤다. 김독자 바로 옆에 앉아 그의 얼굴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는 자신을 확인한 그는, 왜 김독자가 일어나자 마자 저런 질문을 했는지 납득했다.
“…아무것도 아니다.”
이런 자신의 변화를 알리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에, 그는 자신의 몸을 뒤로 뺐다.
“그래?”
김독자는 웃었다. 유중혁은 자신이 뒤로 물러선 만큼 가까이 다가오는 김독자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뭐하는 거지?”
“중혁아. 여기 너무 할 거 없다, 그치?”
할 게 없긴 무슨. 김독자가 밤에 어디를 갔는지, 어제도 어딘가로 떠났었는지, 자신에게 숨기는 것을 전부 말하기 전에는 할 게 없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유중혁의 두려움이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김독자가 말을 꺼낼 때까지 믿고 기다리라고 강요하는 그 감정이 그를 숨막히게 했다.
“…”
말을 꺼내야 하는데, 말을 시작할 수 없었다. 자신이 김독자의 계획 끄트머리를 발견했다는 것을 안 김독자의 행동을 예측할 수 없었다. 순순히 말을 할 가능성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김독자에게 어디를 간 것이냐 묻는다면.
김독자는 떠날 것이다.
수없이 많은 시나리오를 함께 했다. 함께 보낸 시간과 같이 버텨낸 역경 속에서 김독자는 몇 번이나 사라졌었다. 자신 앞에 마주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혼자 떠맡기 위해서. 유중혁은 지금 김독자가 몰래 하는 일도 혼자 감당하려는 움직임이었음을 모를 정도로 바보가 아니었다.
“저번에도 그렇지 않았나. 당연한 것을 말하는 군.”
그러나 유중혁은 직면이라는 단어로부터 도망쳤다.
“시나리오도 없고, 여유시간이 이 정도면…”
김독자는 유중혁의 허벅지 안쪽 부근을 손바닥으로 뭉근히 눌렀다. 손바닥이 닿은 애매한 위치에 유중혁은 고개를 들어 김독자의 눈을 봤다. 그의 눈은 명백히 한 가지를 원하고 있었다. 김독자의 의사는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다른 거 하자.”
매혹적이었다.
달빛에 비친 눈동자? 끝내 주는 유혹 능력? 다 필요 없었다. 손이 누르는 위치 때문인지, 가만히 있지 못하고 느릿하게 움직이는 손가락 때문인지, 유중혁은 자신의 아래가 답답해진 것을 깨달았다.
“제정신이 아니군.”
유중혁은 자신에게서 떨어질 줄 모르는 김독자의 손을 쳐냈다. 진실에서 도망치더라도 진실이 있었다는 것을 잊을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는 김독자의 입이 스스로 열릴 때까지 유도할 생각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진실을 밝힐 때까지 우회로를 만들 생각이었다. 말하고 말하다 보면 밝혀질 것이라고 유중혁은 굳게 믿었다. 그는 입 안쪽의 여린 살을 짓씹으며 날뛰는 자신의 아래 부근을 가라앉히려 했다.
“어라. 거절할 리가 없을 텐데? 못 한지 10일은 넘지 않았나?”
고개를 갸웃거리는 김독자는 유중혁과의 거리를 벌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자신 앞에서 바르작거리는 사람의 다리를 벌릴 생각이라면 몰라도.
“설마 나 몰래 자위라도 했어?”
“누가…!”
김독자에게서 가감없이 나오는 낯뜨거운 말들. 유중혁이 제대로 말할 새도 없이, 김독자는 자신의 몸을 밀착시켰다. 한 손으로 아까의 위치를 다시 점령한 그는 나머지 한 손으로는 유중혁의 복부를 타고 올라갔다. 분명 옷 위로 이루어지는 행위였으나 미세하게 달아오르는 감각에 유중혁은 필사적으로 이성의 끈을 부여잡았다. 자신의 복부 위로 그려지는 선은 김독자의 손끝을 따라 끊김 없이 그의 몸을 매만졌다. 유중혁은 자신의 모든 감각이 자신의 하반신과, 김독자의 주도 아래 그려지는 호선에 집중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했어?”
김독자는 손을 분주히 놀리는 와중에도 얼굴에서 미소를 잃지 않았다. 곱게 접어 올린 입술 끝을 힐끗 본 유중혁은 잘게 몸을 떨었다. 김독자의 손끝은 복부의 살결을 따라 부드럽게 움직였다.
자극적이었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손짓이, 그에겐 너무나도 자극적이었다.
“했, 다면, 읏, 이런, 반응이”
대답을 듣겠다는 건지 말겠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유중혁이 입을 열자 마자 김독자는 그의 성기 부근을 흝었다. 저릿한 촉감에 답을 뱉던 유중혁의 입이 달뜬 숨과 함께 다급하게 닫혔다. 그의 목에 돋은 핏줄과 조금씩 젖어가는 그의 아래 부근만이 욕망을 여실히 드러내 보였다.
“응? 뭐라고?”
유중혁의 귀 바로 옆에서 말하는 김독자의 목소리 또한 열기를 띄고 있었다. 유중혁은 김독자를 밀어내려고 자신의 바지를 헤집고 있는 그의 한쪽 팔을 붙잡았다. 그러나 밀어내려 한 순간, 그는 김독자의 팔이 아닌 그의 옷자락을 세게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큿”
“하아, 손 떼자, 중혁아.”
그의 성기를 지긋하게 누르는 손바닥과 상반신을 유린하는 손길에, 유중혁은 미칠 것 같았다. 복부를 매만지던 김독자의 다른 손은 어느새 유중혁의 복부를 벗어나 조금 더 위쪽을 집고 있었다.
“아니면 이걸 더 좋아하는 거야?”
희게 웃는 김독자의 손은 절대 하얗지 않았다. 유중혁의 상체에서 유독 도드라진 부분이 옷 위로도 느껴질 만큼 적나라하게 솟았다. 김독자는 손톱을 세워서 솟아오른 그곳을 천천히 긁었다.
“…!”
유중혁은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가슴 언저리에서 자신을 유린하는 손길에 신음이 자꾸만 새어 나왔다. 빳빳해 진 그곳을 자꾸만 손톱으로 긁어 내려서 틱틱,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김독자는 자신의 앞에서 잘게 몸을 떨고 있는 그를 보며, 당장이라도 옷을 찢어버리고 살갗을 느끼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결을 따라 문지르면, 어떤 반응을 보여줄까. 허리를 붙잡고 정신 못 차릴 정도로 박으면, 축축하게 젖은 앞섶과 참지 못한 신음 소리로 겨우 자신을 붙잡을 유중혁. 김독자는 유중혁의 안에 자신의 욕정을 깊숙이 흩뿌리고 싶었다. 상상만으로도 밀려오는 짜릿한 고양감에 김독자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냥 바로 해버려?
“아”
김독자는 자신의 목덜미를 물고 있는 유중혁을 응시했다. 잠시 김독자의 손이 멈춘 사이 유중혁이 보여준 나름의 대답이었다. 이 사이로 나오는 숨은 덥다 못해 뜨거웠다. 깨문 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는지, 자신의 목덜미를 핥고 빨아들이는 그를 보며 김독자는 유중혁의 뒷머리를 움켜 잡았다.
“중혁아. 항상 이렇게, 읏, 나를 자극하지 못해서 안달이지.”
“누가 할 소릴”
네 옷이 한 벌인 걸 다행으로 여겨.
김독자는 유중혁 바지의 버클을 빠르게 풀었다. 그 안으로 드러난 얇은 속옷 한 겹. 이미 흠뻑 젖어서 솟아오른 성기의 모양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을 보며 김독자는 생각했다.
아니면 진작 다 찢었어.
[전용 스킬, ‘제 4의 벽’이 발동합니다!]
자신이 참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한 그는 유중혁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여유없이 집어삼키는 입술에 유중혁 또한 다급하게 자신의 자리를 찾았다. 서로의 타액이 얽혀 흥분감에 박차를 가했다. 김독자와 유중혁은 정신없이 서로를 갈구하고 서로에게 욕정했다. 그들은 서로를 느끼기 위해 거슬리는 것들을 치웠다. 바닥에 떨어진 옷가지는 물에 젖은 듯 묵직하게 늘어졌다.
“지금도 거절하고 싶어?”
김독자는 자신의 앞에서 헐떡이는 유중혁의 턱선을 따라 손끝을 움직였다.
“닥, 치고, 빨리.”
“…쉽게 끝낼 생각은 버려.”
목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김독자의 손에 유중혁의 몸이 끌려갔다.
“하… 밤 샐까, 중혁아?”
끈적한 점액이 길게 늘어지며 서로를 잠식해 갔다.
[■■까지 5일 남았습니다.]
[5일 동안 ‘등가교환’이 성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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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은 매일 같은 시간에 떠올랐으며, 같은 열기를 유지했다.
“윽”
유중혁은 평소처럼 일어나려다 깊은 곳에서부터 느껴지는 강렬한 통증에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그간 못했던 한을 푸는 것처럼 거칠게 몰아붙이는 김독자를 말릴 수 없었다. 고통에 입을 열면 나오는 것은 신음 뿐이었다. 다른 말 따위 용납하지 않겠다는 추삽질에 그가 할 수 있었던 건 김독자의 팔을 붙드는 것이 전부였다.
간신히 일어난 유중혁은 김독자에게 항의하기 위해 방향을 틀었다. 공허한 하늘 아래에 많은 것이 존재하지는 않았지만 유독 눈에 띄게 존재감이 사라진 것이 있었다.
…김독자?
주변을 둘러보아도 보이는 것은 부서진 콘크리트 뿐이었다. 유중혁은 찌푸린 얼굴을 더욱 구겼다. 김독자가 기어코 아침까지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만약 그가 돌아올 때까지 자신의 움직임이 자유로워진다면, 김독자를 위하는 마음을 가득 담은, 주먹의 대화를 나눌 생각을 하는 유중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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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온기가 살짝 실릴 무렵, 유중혁은 끝없는 먼지구름만 존재하는 풍경을 지켜보기만 하는 것에 물렸다. 대체 무엇을 하느라 이렇게까지 늦는 건지, 유중혁은 조금 불안해졌다. 다칠 수가 없는 환경에서 다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터무니없는 이야기였기에 그는 스스로 생각을 지웠다.
그는 다시 김독자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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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김독자는 수평선 너머로 해가 반쯤 잘릴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유중혁은 이제 혼란스러웠다. 걱정을 반복하다 얻은 결론은, 절대 김독자의 부주의로 돌아오지 못할 리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 상황에서 유중혁은 마지막까지 미뤄두었던 가정 하나를 떠올렸다.
…김독자가 돌아오지 않는 거라면.
이별의 의미로 그와 몸을 섞고 떠나버렸다면? 그것도 모르고 김독자 아래에 깔려 헐떡이던 자신을 얼마나 가엽게 여겼을까.
나를 기만한 것인가.
유중혁은 자신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것 같았다.
김독자가 곤란해 할까 봐 그가 몰래 밤에 빠져나간 것에 대해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그가 자신에게서 도망치는 것이 두려워서, 김독자는 아침에는 돌아온다는 것을 빌미로 스스로를 위로하고 더 이상의 궁금증은 차단했다. 매일 들리지도 않는 시계바늘의 초침 소리가 그를 채찍질하는 느낌이었다. 초조하고 두려웠다. 마지막까지 참다 이제야 조심스럽게 접근하려던 자신을 막고서, 욕정으로 자신을 덮어버린 김독자를.
나는 어떻게 대해야 하지?
김독자를 잃을까 두려웠다.
아니, 이제 김독자의 의지로 돌아오지 않는데, 더 이상 그를 잃을까 걱정할 필요가 있는 걸까? 답은 부정이었다. 잃을 것이 없는데, 걱정할 것이 남아있을 리가.
유중혁은 지겹게 겪어온 절망감이 자신을 휩싸는 것을 막지 않았다. 이제껏 소중한 사람을 잃을 때마다 겪던 지독한 감정. 가슴 한켠을 저미고 쑤시는 감정은 도무지 익숙해질 수 없었다. 게다가 새로이 추가된 고통이 있다면 이번에는 죽음으로 인한 이별이 아닌 상대의 의도에 의한 결별이라는 것. 유중혁은 자신의 감정을 감당하기 버거웠다. 버겁고도 힘겨워서, 스스로를 괜찮다고 위로하며 한 손으로 앞머리를 쓸어 넘기던 유중혁은 김독자의 말을 떠올리게 되었다. 이곳에서도 김독자를 잃어버린 것일까 두려워했던 그날, 김독자가 유중혁에게 읊어주던 그 말.
‘내가 널 찾으면 돼.’
“…”
유중혁은 웃었다. 미친 사람처럼, 그는, 웃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듯이. 웃고, 웃고, 발을 구르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 소리를 질러도 보고, 바닥에 누워도 보았다. 그리고 드는 생각.
아, 세상이 나를 버렸구나.
유중혁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해가 없기에 빛나지 못한 맑은 물줄기 하나가 그의 내면에서 조용히 흘렀다.
[■■까지 4일 남았습니다.]
[4일 동안 ‘등가교환’이 성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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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해가 떠올랐다.
유중혁은 잠에서 깬 것과는 별개로 눈을 뜨지 않았다. 끝없는 시간의 연속되는 선상에 갇혀버린 것 같았다. 시나리오가 끝나도 김독자를 만날 수 없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 혐오스러웠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떠나 있겠지. 그럴 바에는 차라리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이곳에서도, 현실에서도, 김독자가 없을 미래에도.
유중혁은 태양 아래 잠을 청했다. 오랫동안 깨지 않기를 바라면서, 꿈 속에 자신을 가두었다. 어쩐지 김독자의 말이 들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유중혁은 다시 웃기 시작했다.
[■■까지 3일 남았습니다.]
[3일 동안 ‘등가교환’이 성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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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같은 해가 뜨고 졌지만 이제 유중혁에겐 낮과 밤의 의미가 없었다. 꿈을 꾸기도 하고, 꿈을 꾸지 않기도 했다. 얕게 잠들 때도, 깊게 잠이 들 때도 있었다. 뭐든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도피성이었으니.
“…”
등이 배기고 온몸이 저렸지만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다시금 빠져드는 잠 속에, 꿈이 그를 맞이했다.
‘중혁아, 우린 세상을 구할 수 있다. 알지.’
누가 그딴 것을 모르나.
한때 거쳐온 듯한 익숙한 시나리오. 위기도 많았고, 어렵게 헤쳐 나갔던 것 같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과 함께 김독자의 실루엣이 흐릿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빠르게 넘어가는 장면.
유중혁은 김독자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김독자는 울고 있었다. 유중혁은 이것이 자신의 꿈임에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쩌면, 이것이 자신이 원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중혁아, 중혁, 아, 중혁아…’
반복해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보며, 유중혁은 자신의 욕망이 반영된 결과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근데 난 김독자가 다치는 것을 바란 적이 없는데.
장면은 다시 이동해서, 어느 공간에 부유하고 있는 자신과 김독자를 비추었다.
완벽한 암흑이었지만 서로의 존재를 느낄 수 있는 기괴한 공간이었다. 김독자와 유중혁은 피를 흘리고 있었다. 빈말로도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상처였다. 그러나 여전히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유중혁은 꿈 속 김독자의 얼굴을 살폈다. 좀 전엔 울고 있었는데, 지금은 어떨까.
그는 울고 있지 않았다.
그냥, 상태가 조금 이상해 보였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는 무엇인가 잘못 진행되고 있는 듯, 이상한 표정이었다. 궁지에 몰린 느낌이 여실히 느껴지는 그의 모습에 유중혁은 의문을 가졌다.
왜?
그리고 그 답은 쉽게 도출되었다. 저쪽에는 유상아가, 이쪽에는 한수영이 있었다. 그들은 누운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죽었다.
유중혁은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죽은 것이다. 그리고 분명, 이들이 김독자의 예상 외의 결과였을 것이다. 유중혁은 앞쪽에서 김독자와 자신을 몰아붙이는 미지의 ‘격’을 향해 무의식적으로 대항했다.
유중혁은 자신의 뒤에 위치한 인영이 자꾸만 자신의 집중력을 흩트리는 것이 느껴졌다. 유중혁은 다시 김독자를 봤다.
그리고 깨달은 사실은, 무언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잘못되었다는 것이었다.
…
짧았던 꿈이 끝났다.
유중혁은 오랜만에 눈을 ‘떴다’. 잠에서 깨더라도 눈꺼풀을 들어올리지 않고 다시 잠을 청하기를 몇 번. 그는 몇 시간만에 눈을 뜬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하늘에 떠 있는 제한시간을 보았다. 오늘까지 포함하면 3일가량 남았다는 사실에 유중혁은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 몰랐다. 곧 만날 테니 행복해야 하나? 이 시나리오가 끝나도 김독자는 자신의 곁에 없을 테니 절망해야 하나?
유중혁은 그저 웃었다.
고백에 성공한 사람처럼, 하루만에 연봉이 2배가 된 사람처럼, 일생의 꿈을 이룬 것처럼, 때로는 단순히 날씨가 좋아서 나오는 웃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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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공허한 웃음으로 서울을 가득 메우던 유중혁은 돌연 웃음을 멈추고 몸을 일으켰다. 그는 김독자가 걸어갔던 방향으로 걸었다.
꼴 사나웠다.
초조함을 알고 두려움을 알고. 감정을 다시 알게 된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자신의 몸뚱아리가 마치 미약을 처먹은 것 마냥 날뛰는 것 같아서, 그는 발걸음을 떼었다. 식은 모닥불을 뒤로한 채로, 유중혁은 생각했다.
유중혁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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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보다 고요한 곳에서는 아무런 자극도 찾을 수 없었다. 오직 자신의 발걸음 소리와 바람 소리만이 유일한 리듬이 되어 세상을 이루었다. 유중혁은 걸었다. 자신의 앞쪽으로 흉측한 형태의 건물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을 보며, 유중혁은 계속 걸었다. 저 앞의 것이 63빌딩의 잔해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을 때, 그는 멈추었다.
콘크리트 사이로 희뜩희뜩 보이는 것이, 유중혁의 시신경을 자극했다. 그는 깊은 곳에서부터 자신을 침식해오는 무언가를 인식했다.
엿 같았다.
분노를 앞서는 안도, 불안, 환희. 자신의 자아를 지탱해주던 존재가 마침내 그를 갉아먹어 버렸음을, 성급히 흰 색체를 띄고 있는 존재를 향해 다가가는 유중혁의 ‘갈망’은 알지 못했다.
나를, 나로 남겨두었으면 좋았을 텐데.
“…김독자?”
“…”
명백히 두 다리를 딛고 서 있는 형체을 보며, 유중혁은 입에 고여 있던 말을 끄집어 냈다.
돌아보지 마.
아니, 돌아봐 줘.
“유중혁.”
빌어먹게 차분한 목소리였다. 뭐라고 말을 하고 싶었으나, 말을 고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신을 찾아 나설 것을 예상하고 이곳에 서 있었던 것인지. 왜 자신이 이곳까지 오게 만든 것인지. 만약 자신이 이곳으로 올 것을 알았다면 김독자를 다신 못 볼 것 같다는 자신의 직감은 어긋난 것이었는지. 성급한 판단에 불과했는지. 애초에 자신은 왜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인지.
오점 투성이었다.
웃어 제끼던 과거의 자신이 싫었고 그딴 감정에 휘둘리던 자신이 수치스러웠으며 지금도 김독자가 자신을 기다렸을 2일이 넘는 시간을 걱정하는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음. 너를, 기다린 게 아닌데.”
“…”
자신을 기다리지 않았다 선언하는 김독자를, 기다렸을까 걱정하던 자신이 여기, 홀로 서 있다는 사실이.
유중혁은 감정의 격변 속에 휩싸였다. 그는 비겁하게 웃고 있는 희멀건 얼굴을 향해서 주먹을 내질렀다. 그대로 넘어가는 형체가 김독자라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자신이 빚어낸 악몽이었다면. 그 꿈 속에 갇힌 것이라면. 꿈에서 깨지 못하더라도 기꺼워할 자신 있었다.
“중혁아.”
입 안의 여린 살이 터져버렸는지, 김독자는 핏덩어리를 뱉으며 말을 이었다.
“그거 알아? 여긴 시나리오가 아니야.”
악몽인가? 악몽인가보다. 저딴 헛소리를 지껄이다니. 유중혁은 자신이 단단히 미쳤다고 생각했다.
“꿈도 시나리오도 아니라고 개복치 새끼야.”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여긴 현실이야.”
언제나 현실이었다. 한 회차 분의 생을 살아갈 때도 매일이 그에겐 현실 그 자체였다. 세상의 멸망을 막기 위해 죽음을 반복하는 순간마저 현실이었고, 현실은 곧 시나리오였다.
“현실이 시나리오다.”
“맞아. 시나리오가 끝나지 않았다면 그렇겠지.”
“…뭐?”
“시나리오는 더 이상 없어. 이 공간은 우리가 세상의 ‘끝’이라고 부르던 곳의 연장선이야.”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첫날, 김독자의 말을 너무 쉽게 믿은 것이 화근이었다. 아니, 지금이 거짓인가?
“지금이 세상의 ‘끝’이라면, 위에 떠 있는 제한시간은 어떻게 설명할 거지?”
“저건…”
현실에 저딴 것이 있을 리가 없었다. 유중혁은 허술하기 짝이 없는 김독자의 거짓을 비웃고 싶었다.
“아직 ‘■■’이라고 불리던 것이 실현되지 못했다는 증거겠지?”
“…”
“유중혁. 난 네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기억해.”
“그것이 실현되지 못했다면, 지금은 시나리오 중이 아닌가?”
“정확히는 세상의 ‘끝’을 넘어선 곳이지. 시나리오의 끝을 보고 ‘■■’으로 가기 위해 진행되고 있는 과도기. 그게 지금이야.”
믿을 것도, 의심할 것도 너무 많았다. 확실하지 않은 정보가, 피 터진 사내의 입에서 줄줄 새고 있었다.
“그럼, ‘■■’은 무엇이었지?”
“‘구원’.”
가려져서 보이지 않던 세상의 ‘끝’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에 유중혁은 현실감각이 흐려지는 것 같았다.
“8612 행성계의 소생, 모든 생명체에 영생 부여. 이게 세상의 ‘끝’이야.”
정말 자신이 잊었던 기억 속에서.
수많은 회차를 거쳐도 도달할 수 없었던 시나리오의 결말이, 무슨 짓을 해도 ‘■■’로만 들렸던 세상의 ‘끝이’.
존재했다면.
…내 삶은 어떻게 되는 거지?
유중혁은 감당할 수 없는 개연성의 굴곡 아래에 놓인 작은 아이가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제야 흐름을 거슬러 갈 수 있게 되었는데, 누군가가 흐름을 뒤바꿔 놓았다. 이제껏 자신의 목표가 계곡을 거스르는 것이었다.
그 목표를 위해 아등바등 나아갈 적에, 자신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누군가를 들였다. 스스로 내면의 문을 열어 젖힌 것이 화근이었다.
이젠 추구할 대의가 사라졌다고 한다. 거기다 자신의 ‘갈망’을 통제할 수 있는 누군가는 자신을 떠나 보내려 한다.
나락.
현실이었다.
“…내일,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다.”
폐부가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내일까지만… 이곳에 있어라.”
유중혁은 김독자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 자리에 몸을 뉘였다.
김독자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까지 2일 남았습니다.]
[2일 동안 ‘등가교환’이 성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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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은 타오르지 않았다. 차게 식은 태양은 조명의 역할을 할 뿐이었다. 마치 모든 기력을 소진한 하나의 생을 투영한 듯도 했다. 그저 떠올랐기 때문에 졌다. 그만큼 시간은 덧없이 흘렀다.
유중혁이 세상의 ‘끝’을 받아들이기까지, 꼬박 한나절이 소요되었다. 김독자는 유중혁이 세상의 ‘끝’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 유중혁이 부상을 당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처구니 없었지만, 유중혁은 하나하나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회차를 거듭해 가면서 살아왔던 생에 의미를 찾기 보다, 현실에 적응할 때까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 걸렸다.
유중혁은 너무 오랜 기간 홀로 회귀했다.
“영원히 살 수 있으면 어떨 것 같아?”
같지만 다른 생을 끝없이 살아온 유중혁이었다. 그러나 그 또한 필멸자의 생을 걸어왔기 때문에 유중혁은 김독자의 질문에 답할 수 없었다.
어쩌면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상황이 지금처럼 엿 같지만 않았다면.
밤이 되면 김독자는 다시 떠날 것이 분명했다. 유중혁은 알 수 있었다. 김독자는, 자신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 같았다.
‘너를 기다린 게 아닌데.’
유중혁을 본 직후, 김독자의 입에서 처음 나왔던 말. 그 말을 들었을 당시에는 김독자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이리라.
…누구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지?
김독자가 기다릴 법한 사람은 몇 있었으나, 유중혁은 여전히 이 상황을 납득하기 어려웠다. 자신 앞에서 유령처럼 앉아 있는 김독자는 시나리오 중에도, 세상의 ‘끝’이 지나간 후에도 여전히 의중을 파악하기 힘들었다.
“보고만 있는다고 의문점이 해결되진 않는다는 거, 알잖아?”
김독자는 베일 듯한 유중혁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의 눈 뒤에 무엇이 웅크리고 있는지 알면서도, 김독자는 유중혁의 내면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누가 영생을 얻는 거지?”
“당연히 모든 사람들이지.”
김독자는 보편적인 대답을 하였다. 유중혁은 바닥을 땅을 응시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왜 나를 속였지?”
“음, 글쎄. 재밌을 것 같아서?”
재밌어서 속였으면. 질려서 나를 버린 건가?
유중혁은 비참했다. 하지 못할 말을 조용히 속으로 삭히게 된 자신의 처지가, 더 이상 원래 자신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게 된 자신이, 그것을 알고 있을 법한 김독자의 변하지 않는 태도가, 그저 웃고만 있는 김독자가, 그를 좀먹었다.
“누구를, 기다리고 있었지?”
“…한수영과 유상아.”
…왜?
아귀가 맞아 떨어지지 않았다. 이곳에 그들이 있을 수 없었다.
이건 진실이 아니다.
둘 사이에 가볍게 내려앉은 침묵. 유중혁은 침묵에 돌은 던졌다. 물에서 일으킬 법한 파장을 공기 중에서도 일으킬 수 있다는 듯이 내던진 돌이었다.
“거짓이군.”
“…”
“나를 속인 이유도, 기다리고 있던 사람도, ‘구원’을 선택한 것도, 세상의 ‘끝’을 본 것도.”
김독자의 웃는 얼굴에 미세한 균열이 일었고, 균열은 유중혁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 그러다 문득 드는 생각.
만약.
내가 꿨던 악몽이, 꿈이 아니었다면?
“…한수영과 유상아는 죽었는데 어떻게 너를 찾아온다는 거지?”
김독자는 적잖이 당황한 듯했다.
‘구원’을 선택했다면, 모든 사람이 영생을 살 수 있다면, 영생을 얻을 사람은 죽은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 김독자와 유중혁 이외에, 이곳에 사람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딴 상황에서, 김독자가 ‘구원’을 선택한다는 것은 성립할 수 없었다. 기다린 사람도, 존재하지 않았다.
“똑바로 답해, 김독자. 내가 우스워?”
“…”
너조차 믿지 못하게 된 내가 얼마나 같잖을까.
“잔머리 굴리지 마. 아직까지 양심이 남아 있다면, 선을 지켜.”
“세상의 ‘끝’은 지났어. 내가 기다리던 사람은…”
김독자는 숨을 들이켰다.
“그래. 유상아? 한수영? 다 좋아. 아무도 여기 없다고. 난 걔네를 ‘기다린’ 게 아냐, 중혁아.”
다리를 세우고 앉아 유중혁을 똑바로 응시하던 그는 몸을 일으켰다. 흰 코트에 묻은 먼지를 탁탁 소리 나게 터는 김독자의 모습은 너무나도 일상적인 것이라, 뒷말 또한 별 것 아닌 것처럼 들렸다.
“데려와야지.”
[■■까지 1일 남았습니다.]
[1일 동안 ‘등가교환’이 성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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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 있는 채로 새 날을 맞은 터라, 아직 해 따위 뜰 시간이 되지 못하였다.
“…”
유중혁은 머리의 핏줄이 팽팽하게 당기는 것이 느껴졌다.
“네놈 말 대로 시나리오가 끝났다면 명계도, 성좌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지금 우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인데, 어떻게 죽은 사람을 살린다는 거지?”
“멸망도 막았는데, 죽은 사람 살리는 게 대수일까?”
이제껏 알던 김독자는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길을 터서 나아가던 사람이라, 유중혁은 이번에도 두 사람을 살릴 방법을 알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잠깐동안 했다. 그러나 그는 이내 자신의 생각을 부정했다. 지금은 현실이었다. 꼼수 따위 받아들여주지 않는 현실로 돌아왔다.
현실의 김독자는, 그 또한 일반인의 생을 살아왔음을, 유중혁은 잊지 않았다. 대한민국에서의 현실은 그런 곳이었다.
“멸망을 막아서 세상의 ‘끝’에 왔다면.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을 알지 않나?”
혹시 김독자가 미친 것은 아닐까. 이제껏 해내지 못한 일이 없었는데,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못하고 무모한 일을 벌이려는 건 아닐까.
빌어먹게도, 유중혁은 김독자를 걱정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중혁아, 나 믿지?”
김독자가 웃으며 건넨 말은 유중혁이 해석하기에는 너무 추상적이었다.
자신을 믿으라는 건가? 자신에게서 관심을 거두라는 건가?
유중혁은 그것을 물을 여유가 없었다. 실낱 같은 희망은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었다.
“…하나만 약속해라.”
유중혁은 희망의 덫을 놓았다. 제발, 이것 만이라도.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인간 ‘구원’하겠다고, 널 버리지 마라.”
김독자는 침묵했다. 별이 자리를 옮길 때까지, 그는 침묵했다.
그리고 마침내 내놓은 답은,
“그래.”
유중혁을 위한 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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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지나고 낮이 되어도, 낮이 지나고 제한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까지도, 김독자는 더 이상 다른 곳으로 향하지 않았다. 마치 이미 유상아와 한수영을 되살릴 수 있도록 수를 써 놓은 사람처럼,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종잡을 수 없는 김독자의 태도는 도무지 그의 진심을 가늠할 수가 없게 만들었다. 곪은 곳이 더욱 썩어가는 느낌이라, 유중혁은 김독자를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눈앞에 있음에도 존재를 믿을 수 없는 김독자는 신기루 같았다.
“중혁아.”
지금 자신을 부르는 이 말도 한순간에 아스라져 버릴까 봐, 자신이 버렸던 세계처럼 떠나가 버릴까 봐 불안했다.
유중혁이 살짝 찌푸린 표정으로 돌아본 순간, 그는 자신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손길에 속절없이 끌려갔다. 신기루가 아니라는 듯이 강하게 주장해 오는 그 촉감은 또 너무 생생해서, 유중혁은 자신 앞의 신기루와 입술을 맞댄 채로 한참 있었다.
“뭐 하는 짓이지?”
떼고 나면 또 사라져 버릴 것 같아서, 그는 마냥 그 순간을 누리고 있을 수 만은 없었다.
“중혁아, 난 너와의 모든 것을 간직하고 싶은데, 영원 같은 삶과 찰나의 생에서의 행위는 같더라도 의미는 다를 거란 거는 알잖아.”
“…”
“넌 아니야?”
유중혁은 자신을 응시하는 김독자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만약 누군가 그때 그에게 저 말에 동했냐 묻는 다면, 글쎄, 유중혁의 답은 정해져 있었다.
“…김독자.”
유중혁은 김독자를 향해 자신의 몸을 기울였다. 베어낸 감정을 찾아준 것, 자신에게 들끓는 무언가를 가르쳐 준 것, 끝까지 곁을 지켜준 것 모두 김독자였다. 애초에 김독자는 유중혁에게 불가항력에 가까웠다.
김독자는 유중혁이 가까워진 만큼 자신의 몸을 뒤로 젖혔고, 마침내 그의 등이 바닥에 닿았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던 둘은 다시 거리를 좁혔다. 눈을 천천히 감으려는 둘 사이의 거리가 종잇장이 간신히 들어갈 만큼 남았을 때.
“또 그렇게 버리려는 건가?”
유중혁은 김독자를 향해 눈을 고정했다.
맹수. 그 어떠한 것보다 유중혁의 그것을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런 유중혁을 정면으로 마주한 김독자는 조용히 침을 삼켰다.
뻔뻔스러웠다.
오직 그 만을 보게 만들어 놓고 이제 와서 잘라내려는 김독자에게, 그러면서도 끝까지 발뺌하려는 그에게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는 유중혁이었다.
“버리다니, 중혁아. 내가 너를 어떻게 버려?”
“닥쳐라! 며칠 전에 떠난 것도, 단순히 네놈의 방랑벽이 도져서가 아니지 않나!”
입 밖으로 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 없다. 나와버린 말은 진실이 되어 흘렀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사실에, 유중혁은 자신 안의 무엇인가 깨어짐을 느꼈다.
눈물이 흘렀다.
“나를, 버려?”
“…”
“애초에 감정이 생기도록 하지 말았어야지. 죽여야 할 사람들을, 죽이도록 놔뒀어야지. 추락하고, 검에 꿰뚫리던 나를!”
“…중혁아.”
“나를, 그대로 나인 채로 놔뒀어야지.”
이 또한 덧없이 흘러갈 버릴 아우성임을 알기에.
“유중혁.”
눈물이 흐르면 흐르는 대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김독자를 내려다보는 유중혁의 얼굴에서, 저릿한 물기가 김독자의 얼굴로 하나 둘 추락했다. 그곳에서조차 미끄러지는 물기는 메마른 흙을 적실 정도는 되지 못하였다. 눈물의 양이 적었다. 절망에 양이 있다면, 절망이 부족했다.
김독자는 유중혁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동양에서 3은 완전한 수, 4는 죽음을 뜻 하는 거 알지?”
“말 돌리지 마라, 김독자.”
억누르는 목소리로 말하는 유중혁의 의사 따위 상관없다는 듯, 김독자는 말을 이었다.
“그럼 1과 3의 공존은, ‘완전’을 가장한 ‘죽음’이 아닐까?”
“…뭐?”
영문 모를 말을 계속하던 김독자는 자신 위에 있던 유중혁을 강하게 밀어냈다. 그 힘은 꽤나 세서, 유중혁은 힘없이 밀려났다.
김독자가 이렇게 힘이 셌나?
유중혁은 얼굴을 찌푸리며 눈을 깜빡였다.
그 후 그가 바라본 김독자는.
“그리고… 밤에 네가 날 따라왔던 걸, 내가 몰랐을 거라고 생각해?”
마왕의 형상이었다.
한순간 바람이 일었고, 달빛이 날개에 가린 찰나.
김독자는 사라졌다.
[■■까지 31분 남았습니다.]
[31분 동안 ‘등가교환’이 성립합니다.]
[1분 후, 안정화 모드가 시작됩니다.]
[■■ 4분 전까지, 시스템 구축이 완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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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김독자가 저 모습을 하고 있는 거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에서는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왜 김독자만 그대로인지, 왜 자신은 유료화 전으로 돌아가버렸는지.
자신과 한 약조는, 지킬 생각이 없는 건지.
잠시 주위를 살피던 유중혁은 땅을 박차고 달렸다. 가만히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구원’까지 13분도 채 남지 않은 시간을 확인하며, 그는 63빌딩의 꼭대기에 솟아난 그림자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김독자!”
자꾸만 엄습해오는 불안감을 억누르며 달리는 폐허 뒤로 흙먼지가 어지러이 날렸다.
김독자는 왜 자신은 그대로임을 숨겼을까.
아니, 애초에 그 사실을 숨겼다는 것은, 자신만이 그대로일 것을 예상했다는 뜻이었다. 김독자는 모든 상황을 예측하고, 계획하고, 머리 속으로 몇 번이나 생각해 보았을 것이었다.
결국,
최종적으로 남는 명제란.
—김독자의 손바닥 안에 놀아났다.
단 한 문장이 유중혁의 모든 감정을 덧없는 것으로 치부해버렸다.
유중혁은 작동하지 않는 엘리베이터를 지나쳤다. 첫 계단을 내딛고, 중간 중간 끊어진 계단은 뛰어넘었다. 숨은 턱까지 차올라 그를 옥죄었다. 다리 근육이 녹아 내리는 것 같은 감각에도, 유중혁은 멈추지 않았다. 얼마 남지 않은 타이머가 그를 내몰았다. 오직 위를 향해 발을 내지르고 달렸다. 가까스로 이어지는 숨가쁜 소리와 발자국 소리가 어우려지며, 서늘한 공기에도 땀방울이 옷자락을 파고들었다.
“…김, 독자.”
안간힘을 다해 도달한 최상층. 분명 10몇 층쯤 되는 곳에, 천장까지 있었을 장소는 이제 하늘을 떠받치고 있었다. 숨을 몰아쉬던 유중혁은 가슴 언저리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늑골이 부러져서 폐를 난도질하는 것 같았다. 고통스러운 감각에도 그는 눈을 치뜨고 자신 앞의 흰 코트를 입은 남자에게 눈을 고정했다.
“지금 뭐하자는 거지?”
“전부 널 위해서야.”
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어떤 일을 벌이려 하는지, 그 일이 왜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은 채로, 김독자는 홀로 저만치 앞서가고 있었다.
아니, 애초에 동의를 구한 적이 있었나.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언제까지 도망 치기만 할 거냐!”
잠시 침묵하던 김독자가 입을 열었다.
“내가 밤마다 뭘 했을까?”
내가, 알 리가 있나.
자신의 흔적까지 완벽하게 지우고 도망친 마왕을, 일개 인간이 뒤쫓을 방법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새를 죽였어. 네가 첫날에 죽인 새랑 똑같은 종을 다 죽여서 멸종 시켰어. 죽이는 거 정말 쉽더라. 괴수종이랑은 비교도 할 수 없어. 근데 내가 왜 죽였을까? 왜 멸종까지 내몰았을까?”
“…”
“네가 새를 죽였을 때 나한테 선택창이 하나 떴었어. 생명 하나가 소실되었으니, 무엇을 살려내겠냐고.”
“…뭐?”
처음 듣는 소리였다. 마치 소설의 이면을 다시 보는 것만 같아서, 유중혁은 기묘한 감각에 휩싸였다.
무언가, 놓치고 있었다.
“내가 선택하면, 죽었던 생명을 되살릴 수 있대.”
김독자는 타원을 그리며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모르겠어, 중혁아? 여기는 ‘등가교환’이 성립해.”
빙글빙글 어지러이 움직이는 발자국을 눈으로 좇던 유중혁은 김독자의 얼굴을 쳐다봤다.
내가 놓쳤던 게, 이건가.
“그래서 사람으로도 ‘등가교환’을 하겠다는 말이냐?”
“그렇지.”
“희생시키는 목숨은.”
“내 목숨으로.”
“미친놈.”
이건 구원도 아니다.
“2명을 살리려면 2명치의 목숨 값이 필요할 텐데. 날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유중혁의 말을 들은 김독자는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웃기 시작했다. 바람 빠지는 듯한 모양 새가 꼴 사나웠다.
“중혁아. 아무리 생명이 존엄하고, 가치를 매길 순 없다지만, 해당되는 생명이 살아났을 경우에는 말이 다르다? 1명과 100중 어느 쪽을 죽이겠냐고 묻는다면. 글쎄, 1명일 수도, 100명 일 수도 있지. 목숨에는 경중이 없지만 성급하게 절대적인 수로 따지기에는 1명이 누구인지 아직 모르잖아.”
그는 말을 멈추고, 걷던 걸음 또한 멈추었다.
“내가 마왕인데, 한낱 인간인 2명 분의 목숨 값을 치르지 못할까?”
김독자의 눈이 스산하게 빛났다. 발걸음을 옮기며 ‘하지만,’ 하고 다시 말을 잇는 김독자의 그림자에서 천천히 뿔과 날개가 돋아났다.
“세상이 멸망하는데, 그것을 막을 수 있는 1명을 죽일까? 아니지. 모두 100명을 가차없이 죽일거야. 하지만 평범한 일상에서, 1명과 100명이 살아났을 때 할 수 있는 일이 같다면 모두 100명을 살리겠지.”
“…무슨 말을 하고싶은 거지?”
“난 마왕으로서 2명 분의 목숨값은 충분히 치룰 수 있어. 하지만 세상의 ‘끝’을 지나친 지금, 내가 살아도 할 수 있는 건 얼마 없어.”
김독자는 날개를 폈다. 칠흑 같은 어둠이 깃든 양 날개는 그의 몸집보다 몇 배는 더 컸기에, 그가 날 수는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내가 선택한 결말은 ■■. 내 특성으로 선택지가 생겨난 것이라 아직 마왕인 상태를 유지하고 있지만 ■■에 맞는 시스템이 구축되면 곧 사라지게 되겠지. 시스템이 안정화에 돌입했으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난 내 목숨을 가치 있게 쓸 거야.”
…?
왜, 안 들리는 거지?
유중혁은 적잖게 당황했다. 시나리오 내에서만 들을 수 없던 정보가, 이곳에서도 필터링 되고 있었다.
그리고 필터링은,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에서는 덧씌워지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
“모든 것은 상황에 따라 달라. 같은 글을 읽어도 유중혁의 글과 입장이 있으면, 김독자의 글과 입장이 있는 거지. 모두 아는 만큼만 볼 수 있어. 글을 다시 읽으면, 같은 말이라도 의미가 달라. 내가 너를 보면서 대화를 해도, 그 대화가 이어지더라도, 우리는 다른 대화를 하고 있을 수도 있어.”
지금처럼.
김독자는 뒷말을 삼켰다. 말 해 봤자 유중혁은 모를 것이다. 이 빌어먹을 이야기가 끝날 때 즈음이면 몰라도, 지금의 유중혁은 이해하지 못할 게 틀림없었다.
“지금은 나를 예시로 들어서 설명했지만, 그 새도, 너도, 나도 다 대입해 봐, 중혁아. 내 선택은 언제나 옳아.”
답답했다.
한숨을 쉬어도 절대 가벼워지지 않을 마음이, 김독자의 꼬인 말장난이, 그럼에도 그 안에 진실이 있을 거란 믿음에, 그저 이런 현실이, 유중혁은 답답했다.
“다른 대화를 하고 있다고? 그래, 네가 세상의 ‘끝’을 봤을 지라도, 그게 ‘구원’이 아니라는 것은 알겠군. 지금 이것도 다른 대화인가?”
유중혁은 짧게 헛숨을 내쉬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지 않겠다고 약조하지 않았나.”
“맞아. 그 약조, 난 어기지 않았어.”
가당찮은 억지.
“하, 그 둘을 잘 알기 때문인가? 그딴 말장난에 놀아나라고? 정도껏 해라 김독자!”
“…중혁아.”
날개는 바닥에 닿인 채, 김독자가 유중혁을 마주했다.
“널 위해서야.”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서 이해하지 못할 말을 되풀이하는 김독자의 얼굴은 정말 진심이라서.
“기만자.”
유중혁은 김독자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단어를 뱉었다.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고민하던 김독자는,
자신을 보고 있는 유중혁을 마주하고서,
미소 지었다.
[전용 스킬, ‘제 4의 벽’이 발동합니다!]
“…넌 태양이다, 중혁아.”
그 말을 끝으로, 김독자는 사람으로서 허공을 딛었다.
유언이었다.
[■■까지 4분 남았습니다.]
[4분 동안 ‘등가교환’이 성립합니다.]
[시스템 구축이 완료되었습니다.]
[4분 후, ■■이 적용됩니다.]
[‘등가교환’이 성립함에 따라, 당신의 선택이 ■■에 반영됩니다.]
.
.
.
흰 코트가 벽면 너머로 사라진 순간부터, 유중혁은 달리고 있었다. 힘겹게 올라온 계단을 단숨에 내려갔다. 발목이 끊어질 듯 아파도, 유중혁은 다시 발을 딛었다.
퍼걱.
지나치게 적나라한 소리가 창공을 갈랐다.
계단은
환상 같아서,
끝이 보이지 않았다.
점점 더 길어지는 것만 같은,
그런 착각 속에서도,
유중혁은 달렸다.
김독자를 살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믿음으로, 달렸다.
그리고 마침내 도달한 1층의 흙 바닥.
더 이상 황토색이 아닌 흙은 축축하게 물들어가고 있었고, 현실은 버거웠다. 유중혁은 세상의 ‘끝’을 봐도 또다시 자신의 삶에 들이부어지는, 그런 끝나지 않는 절망을 그저 황망히 관망했다.
뒤틀린 채 하늘을 향해 있는 김독자의 발목이, 달빛을 붉게 반사했다.
“…”
무어라 말을 하고 싶었다.
말을, 건네고 싶었다.
“김독…자.”
…왜?
들을 수 없는 대답이라서, 유중혁은 질문하지 않았다.
끝까지 웃던 김독자는 자신의 목숨으로 두 삶을 살렸다. 그것이 ‘왜’ 유중혁을 위한 선택이었는지, 더 이상 답해 줄 사람이 없었다. 마왕의 ‘격’을 소실한 김독자가 반복해서 내보이는 메시지는 오직 죽음 뿐이었다.
유중혁은 김독자 옆에 앉았다. 핏물이 무릎에 스며들었다.
…
무릎 언저리를 적시는 이 감각이 낯설지 않았다.
분명 언젠가 김독자가 자신 앞에서 죽어갈 때의 감각이리라.
그는 기억을 찾아 머릿속을 헤집었다. 하반신이 잘려 나가고, 과다출혈로 죽어가던 김독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동일 인물의 죽음을 몇 번이나 본 걸까. 유중혁은 김독자의 모든 죽음을, 홀로 되짚었다.
유구한 역사, 그 중에서도 무릎이 핏물로 적셔진 기억.
『 곳곳이 부러지고 베여 피가 흐르는 몸.
심장에 정확히 내려 꽂힌 암흑, 숨을 쉴 때마다 뱉어내는 검붉은 덩어리. 옷은 넝마가 되어버렸다.
그냥, 여기까지 라는 게 느껴졌다. 왼쪽 팔이 있어야 할 부근에는 그저 축 늘어진 옷자락이 있었을 뿐이었고, 남은 팔 또한 제 기능을 할 수 없었다.
움직이지도 못하고 움찔거리는 것이 전부인 ‘그것’ 앞에서 시나리오를 클리어하던 사람.
위화감을 느낀 그가 돌아보고는, 다급하게 외친다.
…
“—유중혁!” 』
…?
온몸에 찬물을 끼얹은 것 같았다.
『 늘어진 코트 색이, 검은색이었다.
폐부가 찢기는 듯한 고통이, 떠올랐다.
다가온 사람이, 김독자였다.
불규칙적으로 느려지는 숨 속에서도 알 수 있었던 건 김독자의 온기.
유중혁의 목 뒤를 타고 흐르는 물기가, 식어가는 유중혁을 붙잡았었다.
눈이 자꾸만 감겨서, 자꾸만 흐려져서.
그때 껴안아 주던 손길이,
…그리웠다.
“—중혁아, 안돼. 잘 해 왔잖아. 다쳐도, 죽을 것 같아도, 살았잖아. ‘끝’을 볼 거랬잖아. 볼 수 있댔잖아. 제발.”
등 뒤로 잘게 떨리던 김독자의 손을 잡아줄 수 없었다.
“구원받았다며. 나한테 고맙다며. 내가, 널 구원했다며. 중혁아. 근데, 왜. 왜 그랬어.”
유중혁은 느리게 숨을 뱉었다. 흐릿하게 보이는 김독자의 흰 코트가,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아니, 미안해. 미안해, 중혁아. 제발, 뭐라고 말 좀 해봐. 화를 내든 뭘 하든 좋으니까. 나 혼자 두고 이렇게 떠나지 마…”
유중혁의 마지막 눈짓에, 숨결에, 그의 마지막 눈물이 흘렀다.
유난히 추운 겨울이었다. 』
…
김독자는 한수영과 유상아를 구한 것이 아니다.
그는 또다시, 유중혁을 구원했다.
‘널 위해서야’
왜 김독자가 새를 죽였는지 알 수 있었다.
모든 것을 대비하기 위해. 오직 유중혁을 위해.
왜 무언가 놓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는지 알 수 있었다.
놓쳤던 것은, ‘등가교환’ 따위가 아니었다.
왜 김독자가 이 말을 반복했는지, 알 수 있었다.
유중혁을 살리기 위해서. 오직 그 만을 위해서였다고.
왜 다그치던 그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 안에는, 답이 없었다는 것을.
왜 다른 대화를 하고 있다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김독자에게는 김독자의 입장이 있었음을.
왜 김독자가 자신과의 약조를 지켰다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유중혁을 위해 죽었다.
왜…
유중혁은.
김독자가 죽은 뒤에야 알 수 있었다.
[■■까지 0분 남았습니다.]
[더 이상 ‘등가교환’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
.
.
…
[‘현실’이 적용됩니다.]
김독자는 유중혁에게 잃어버린 현실을 돌려주었다. 이전으로 돌아가진 못하더라도, 감정을 느끼며 살아가도록 그에게 감정을 일깨워주었다. 잃어버린 목숨까지 선뜻 제 것을 내어주었는데.
유중혁이 김독자에게 준 것은.
‘기만자’
꼬리표였다.
모든 것을 내어준 사람에게 달아준 것은, 꼬리표.
유중혁은 자신 옆의 김독자를 응시했다.
한 번만, 네 눈을 볼 수 있다면.
김독자의 피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유중혁의 바지도 말라갔다.
유중혁은 머리 끝자락부터 녹아들어가는 김독자를 향해 몸을 숙였다.
하늘을 향한 발끝에 바치는, 마지막 입맞춤.
발등에 맺혀있던 피가 눈물에 섞여 흘렀다.
그렇게, 김독자는 암흑으로 녹아내렸다.
.
.
.
[8612 내에서 진행된 시나리오 반영, 해당 행성계의 현실로의 전환, ‘현실’이 완료되었습니다.]
이것이 김독자가 바란 세상이었다.
[‘세상의 끝을 걸은 자’ 및 ‘만물의 사랑을 받는 자’의 희생으로, 유료화 후 사망한 생명이 ‘복구’됩니다.]
[‘구원의 마왕’의 희생으로, 신유승, 이현성 등 ‘김독자 컴퍼니’ 성운 소속 등장인물의 생명이 ‘생성’됩니다.]
…
뒤이은 메시지에 유중혁은 말을 잃었다.
[‘김독자’의 희생으로, 등장인물 ‘유중혁’의 생명이 ‘생성’됩니다.]
온전한 ‘김독자’의 희생이었다.
유중혁을 향한, ‘김독자’의 마지막 구원.
[모든 생명이 ‘김독자’를 기억할 것입니다.]
시나리오 식으로 말하자면,
성좌 ‘김독자’는 범우주적 시나리오를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존재이기에 창조주로서, 또 하나의 신격으로서, 위대한 옛 존재로 거듭날 것이었다.
홀로 희생해 세상을 구해버린, 유일무이한 존재.
더 이상 만날 수는 없었지만.
[이제 스타스트림은 8612 행성계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8612 행성계를 배제합니다.]
유중혁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내 이름은, 유중혁이다.
저 멀리, 별 하나가 빛나는 듯도 했다.
유난히 밝은 별이었다.
<역설> 내용 기준 <전지적 독자 시점> 명대사
140화: 어떤 것들은 읽을 수 있기에 오히려 읽을 수 없게 되어버린다.
141화: “이 회차를 버린다고 다음 회차가 좋아질 거라고 착각하지 마. 어쩌면 네가 버리려고 하는 이 회차가, ‘인간’으로서 이 세계의 끝을 볼 수 있는 ‘단 하나의 회차’일지도 모르니까.”
144화: 죽음 이후가 없기에, 역설적으로 인간의 ‘현재’는 소중해진다.
145화: 모든 인간은 단 한 번 죽기에, 그 한 번의 생에 절실한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
죽음에 달관한 필멸자는 없다. 모든 존재는, 죽음 앞에서 무력하다.
168화: 내 이름은 김독자다.
<복선이라기에는 애매한, 콩고물 같은 부스러기들 회수>
1. 유중혁은 태양이라고 김독자가 그랬잖아요? 매번 태양과 관련된 묘사가 나올 때(하루의 시작 도입부에 거의 나옴) 유중혁의 생명을 표현한 겁니다. 빛은 나는데 온도가 낮다는 건, 김독자의 관점이죠. 유중혁은 아직 완전히 살아난 게 아니니까. 짜잔.
2. 김독자는 이제 유중혁을 위해서, 유중혁을 ‘사랑했었야’한다고 했죠. 왤까요?? 김독자는 죽을 테니까요. ‘죽음도 우릴 갈라놓을 수 없다?’ 글쎄요. 제 안의 김독자는 저렇게 낭만적이지 못합니다. 짜잔.
여담이지만, 사랑한다는 단어가 나온 것은 저 때 뿐 입니다. 900년을 버틴 김독자도 감정이 닳을 대로 닳았을 테니, 사랑을 ‘사랑’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 정도까지 된 거죠. 전 사랑을 절대 ‘사랑’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표기하지 않습니다. 900년은… 뒤에 나올 겁니다.
3. 새 손질하는 부분에서 김독자가 말하죠. [중혁아, 난 널 그냥 내버려두고 떠나지 않을 거야.] 그렇겠죠. ‘그냥’ 내버려두겠습니까? 김독자가? 저렇게 ‘맹목적인’ 중혁이로 남겨놓고? …짜잔.
4. 그리고 그 뒤에 고기를 보면서 유중혁이 생각하죠.
[무엇인가 생각날 듯하다 이내 수면 깊은 곳으로 다시금 가라앉았다. 추락, 그리고 추락, 이어지는 추락의 절정. 그곳은 아무것도 없었다고 그는 기억한다.]
예 맞습니다. 추락의 절정은 유중혁의 의식이 사라질 때의 감각입니다. ‘기억’이 맞죠. 짜잔.
5. 2번에 언급되었던 900년! 여기서 나옵니다. 김독자가 깨어나면 시간이 얼마나 지나 있을 것 같냐고 유중혁한테 물었죠. 김독자는 고민 끝에 1369일이라고 답을 말했죠. 1369일은 거의 900년입니다. 즉, 김독자는 유중혁이 사망한 이후로 900년을 홀로 ‘마왕’으로서 지낸 거죠. 유중혁의 다음 회차에는 김독자가 없을 테니까. 그리고 저때 유중혁이 그랬잖아요. 너무 구체적이라고. 짜잔.
6. 김독자가 처음 밤에 나갔다 온 날, 김독자가 유중혁이 따라올 것을 예상했냐고요? 아니요. 유중혁이 너무 >>짐승<<같았던 겁니다. 짜잔.
7. 독자가 마왕인 걸 밝히기 전에 그러잖아요. 1와 3의 공존은 ‘완벽’을 가장한 ‘죽음’이 아니냐고. 완전한 수를 뜻하는 1과 3이 공존하니, 얼핏 보면 ‘완벽’에 가까워 보이지만 둘을 더하면 4가 되죠. 그리고 4는 죽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독자가 저 말을 했던 거죠. 그리고 그때는 ‘현실’이 되기까지 31분이 남았고, 김독자가 죽었을 때 4분이 남았었죠. 여기에는 꽤 많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만, 따로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예? 제가 제일 좋아하는 수요? 3이랑 13인데요. 짜잔.
발등, 발끝 키스
'당신에게 예속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