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극물
내 세계, 내 세계
유중혁은 그의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이건 꿈인가. 현실인가. 그건 이미 중요하지 않다. 눈앞의 그는 이미 나의 현실이니까.
“너는 날 떠나지 않을 거지 중혁아?”
내 앞의 그는 작게 몸을 숙여, 나의 이마에 입을 맞춰왔다. 그 순간 느껴지는 희열, 기쁨, 환희, 찬미. 그의 작은 입맞춤에도 나는 구원을 얻은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아아, 나는 이 사람에게 벗어날 수가 없겠구나. 그렇게 확신한 나는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
언제부터였는지 모른다.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언제부터인가 찜찜한 악몽이 은근하게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 악몽을 꾸면 가위에 눌린 것과 흡사하지만 조금 다른 감각이 온몸을 짓눌렀다. 그나마 그 꿈이 가위보다 나은 것은 꿈속에서의 나는 행동은 자유롭다는 것. 그러나, 요즘 가끔 등장하는 악몽 속의 남자 앞에서는 내 의지대로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리고 깨어나면 꿈임에도 불구하고 방금 겪은 일처럼 꿈속의 불쾌한 감각이 생생하게 온몸을 휘감아왔다.
"헉…. 허억…."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온몸에 식은땀이 가득 흘렀다. 식은땀 때문이겠지. 온몸을 휘감는 찝찝한 기분에 쉽사리 다시 잠을 이루기 어려웠다.
꿈속의 그 남자는 마치 악마와 같은 생김새였다. 꿈인지라 깨어나고 난 후에는 세세한 것까지 기억하기 어렵지만, 커다랗고 검은 세 겹의 날개와 숫양처럼 크게 돋은 뿔이 자연스럽게 악마의 이미지로 연결되었다. 얼굴은 어땠었지? 꿈에서 막 깨어나면 생생한 기분임에도 꿈의 내용이 좀처럼 생각나지 않는 것처럼 그 남자의 얼굴만은 머릿속에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했다. 꿈을 생각해내려고 하니 가뜩이나 제대로 자지 못해 얕은 두통이 있는 것 같던 머리 안쪽이 지끈거리며 더욱 아파져 왔다. 젠장……. 잠이 부족한 탓이다. 잠들고 싶지 않아도, 찝찝한 기분이어도 내일을 위해 나는 잠들어야만 했다.
유중혁은 다시금 눈을 감았다.
✝
"유중혁, 너 오늘 왜 이렇게 피곤해 보이냐?"
"신경 쓰지 마."
"하여튼 유중혁. 걱정해줘도 지랄이야……."
계속되는 악몽이 하루 이틀 이어진 것도 아닌지라, 깊은 잠자리에 들기가 어려웠다. 한밤중에 깨는 것은 기본이고 그 이후에 잠을 설치는 것까지. 그에 뒤따르는 부작용은 턱까지 닿을 듯 짙게 늘어진 다크서클과 꿈을 꾸는 듯 어지러워진 일상. 거기에 지끈지끈 잔잔하게 아파져 오는 두통은 덤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탓인지 조금씩 수면 시간이 늘었음에도, 수면욕은 계속해서 나를 짓눌러왔다. 이런 날이 이어지다 보니 자연스레 일상생활에도 도저히 집중하지 못했다. 졸거나 넋을 놓고 있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고.
마찬가지로 오늘도 멍한 상태로 강의실에 들어와 자리에 앉으니 타이밍 좋게 출석을 하는 교수의 목소리가 귀에서 이명처럼 울렸다.
"유중혁."
"……."
"유중혁 안 왔나?"
"네? 여기 왔습니다."
“그래. 그럼 다음…….”
잠이 부족한 탓에 몸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이제 막 출석을 시작했을 뿐인데도 귀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책상에 팔을 괴고 엎드리자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져 왔다. 오늘 강의는 들어야 하는데……. 곧 시험인데……. 그렇게 생각하여도 머리와 다르게 몸은 계속해서 잠을 청해왔다. ‘수업 들어야 하는데….’ 하는 생각은 어느샌가 끊겼다. 그리고 느껴지는 건 몸이 붕 떠오르듯 가벼워지는 기분과 함께.
‘……꿈?’
또다시 그 기분이었다. 몽롱하고 무언가 나를 억누르는 것만 같아 가위에 눌린 듯하지만, 정신은 멀쩡히 깨어있는 그 상태. 그리고 항상 이 공간이었다. 황망한 느낌마저 들 정도로 적막하게 끝없이 펼쳐진 땅. 아니, 내가 밟고 있는 이 '것'이 과연 땅인가? 하늘과 땅의 구분이 없이 아득했다. 땅과 하늘의 경계조차 모호한 곳에서 부유하는 이물질이 나였다. 꼭 공기 중에 떠있는 먼지가 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런 감정이 느껴질 때 즈음이면 악마 같은 생김새의 그가 등장했다.
"또 왔네?"
"……잘 안 들린다."
"그래? ■■■■. 아직 ■■이 ■■한가?"
"……."
그가 분명히 나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가 무슨 말을 전달하고 있는 건지 그 의미는 전혀 알 수 없었다. 답답함에 그가 하는 말의 의미를 알고 싶었으나, 한편으로는 저걸 들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괴담을 읽을 때면 흔히들 보게 되는 것이 있지 않은가. '그 귀신이 절 쫓아오는데, 잡히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더군요…….' 같은 부류의. 그러나, 자꾸만 꿈속에 등장하는 이 남자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걸지 너무나도 궁금했다.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지만, 나는 고양이도 아닐뿐더러 고작 꿈속일 뿐인데 뭐 어떠한가.
"뭐라고 하는 거지?"
"아직 안 들리는구나. 네가 내 ■■에 넘어오려면 아직 멀었다고 얘기했어. ■■아."
"?"
쿵.
쿵 소리와 함께 몸이 허공에 붕 떴다가 떨어지는 느낌에 파드득 눈을 떴다. 그 후에 느껴지는 건 책상에 부딪히기라도 한 것인지 아릿하게 저리는 무릎과 멍한 머리. 얼마나 잔 거지? 이미 침을 튀겨가며 열성적으로 강의를 하는 교수가 가리키는 칠판은 이해하지 못할 글씨들로 가득 차 있었다. 수업을 듣질 않았으니 당연히 이해를 못 하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지금부터 들어도 저만치 진도가 나가버린 수업을 따라가기는 버거울 터였다. 아픈 것도 아닌데, 유난히 무거운 몸도 신경 쓰였다. 잠을 자도 몸의 상태는 전혀 좋아지지 않았다. 이런 상태라면 조만간 병원에 가봐야 할 터였다.
✝
별일이었다. 밤이 되었는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 고작 며칠 전인데 그 전처럼 잠이 쏟아지기는커녕 나는 맑은 정신으로 멀뚱멀뚱 천장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상하군…….”
필시 이상한 일일 터였다. 그러고 보니 요즘 좀처럼 꿈속의 그 남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꿈을 꿀 때면 늘 등장하는 남자에게 이제는 친밀함? 익숙함? 아무튼. 어떤 감정조차 생길 정도였다. 이상한 기분의 꿈이나, 그래도 다른 사람이-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있다는 것에서 악몽이지만, 그나마 어느 정도 정신적으로 안정을 느끼기도 했고 말이다.
‘허전하네.’
기분이 묘했다. 그렇게나 잠들고 싶지 않았고, 괴로웠는데, 잠이 안 오니 오히려 허전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특히 그 남자가 하는 말을 결국은 듣지 못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뭐라고 하고 싶었던 걸까?’
흐릿한 기억 속에서 그나마 기억나는 것을 떠올려 보면……. ‘네가 내 ■■에 넘어오려면’ 같은 말을 했던 것 같다. 내 ■■가 대체 뭐였을까? 잠이 안 오니 이래저래 잡생각만 느는 모양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침을 삼키는 게 의식되기 시작한다. 라는 문장을 보면 그때부터 침 삼키는 것을 의식하듯, 잡생각 말고 빨리 자야지…. 라고 생각할수록 머릿속에 잡생각은 더더욱 가득해졌다. 미간을 찌푸린 채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하며 양을 세어 보아도 염소 같은 그 남자의 뿔이 떠오르면서 자연히 생각은 오랫동안 계속해서 이어지는 악몽으로 이어졌다.
“젠장.”
이래서야 꿈을 꾸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꿈을 꾸는 것과 다름이 없다. 생각하지 말아야지…. 생각하지 말아야지…. 생각하지… 말…아야지……. 눈을 감고 있길 잘했다. 서서히 졸린 기운이 나를 잠식해왔다. 오늘은 꿈을 꾸지 않길 바라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또 눈을 감았다.
✝
“젠장.”
잠들기 직전과 똑같은 말이 내 입에서 튀어나왔다. 꿈을 꾸지 않기를 그렇게 바랐는데,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평소랑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잠든 시간이 다른 탓일까? 아니면 꿈을 너무 의식한 탓에 다른 꿈을 꾸나? 평소같이 붕 뜬 기분이 아닌 ’땅에 발을 딛고 있다.’라는 것이 의식적으로 느껴졌다. 발끝에서부터 수평선까지 펼쳐진 것은 하얗고 하얀 꽃들의 나열.
“중혁아.”
“……?”
깜짝이야. 그 남자였다. 흰 꽃들과 대조되는 검은 날개를 소리 없이 접으며, 옆에 다가와 슬며시 옆에 앉은 남자는 내 이름을 부르며 미소지었다. 그보다, 내 이름을 불렀다고?
“내 이름을 어떻게 알지?”
“내가 이곳으로 널 불렀으니까.”
“뭐?”
꿈이다. 단순한 꿈이다. 이건 나의 무의식일 뿐이다. 그렇지만 직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유중혁, 이건 단순한 꿈이 아니야.
“네가 원흉이었군.”
악몽의 원인인 남자를 한 대 패주면 속이라도 시원할 것 같아 일어나 그 남자에게 다가가니, 비리비리한 체격의 그 남자는 손으로 나를 밀어내는 시늉을 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여전히 얼굴은 흐릿했지만, 흐릿한 인상 너머로도 느껴지는 당황한 표정은 덤이었다.
“중혁아, 잠깐! 잠깐 진정해봐!”
“뭘 진정하라는 거지? 네놈 때문에 나는 일상생활에 지장이 생기고 있다.”
“나도 이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변명은 듣지 않는다.”
“뭐!? 변명 아니야. 중혁아, 내가 그게…….”
그 남자가 둘러대는 말은 그거였다. 이 일은 자신의 의도가 아니고 단순한 실수였으며, 인간들은 보통 자신을 ‘인큐버스’라는 말로 지칭한다는 것이었다. 아무튼, 이곳은 그런 마족들의 공간이고, 자신의 이름은 인간들의 이름으로 치환하면 ‘김독자’라는 이름이라 말했다. 이름 한 번 특이하다. 김독자라니. 인큐버스 중에는 그러면 김작가나 김편집장도 있나? 인큐버스라면서 이름은 왜 저런 건지 모를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 남자의 말을 아예 못 믿는 건 아니었다. 머리에 돋은 악마 같은 뿔과 너무나도 검어 눈이 먼 것은 아닐지 의심되는 날개가 꿈속일지라도 그가 보통의 인간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으므로.
“아무튼, 정말 고의가 아니라고?”
“그렇다니까…. 나도 얼마나 답답했는지 몰라. 계속 말이 안 통하니까 이걸 얘기해줄 수도 없고.”
“흠…….”
눈앞의 남자가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낑낑거리는 강아지처럼 애처로운 표정을 짓는 것이 거짓말이라고는 못할 것 같은 인상이었다.
“계속 얘기를 하는데, 너랑 말이 안 통하잖아. 그렇다고 이미 저지른 일을 되돌릴 수도 없고…….”
"네 얘기가 들리질 않았다. 오해했군."
"그래. 오해야 ■■."
■■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파드득 또다시 꿈에서 깨어났다. 그렇지만 평소와 다른 내용이어서 그런 걸까. 전처럼 식은땀은 흘렀지만, 몸이 무겁다거나 안 잔 것 같은 피로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몸이 개운해지는 기분이었다. 꿈이 오늘만 같으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기분 좋게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
"유중혁, 너 요즘 뭔 일 있냐?"
"아무 일도 없다. 뭐냐."
"너 완전 송장이야 송장, 산송장. 병원 좀 가봐라. 인마."
"그럴 필요 없다."
"진지하게 조언해주는 거야. 진짜 아파 보여 너.“
그럴 리가 없었다. 요즘 내 컨디션은 상중하 중에 고르자면 상 중에서도 최고조였다. 악몽이라고 생각했던 꿈은 악몽이 아니었고, 오히려 김독자를 만나는 것이 기대될 정도였다. 온종일 졸렸던 것과 다르게 다시 삶에는 활기가 돌아왔고, 오히려 생기가 넘치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기분 때문에 오히려 이제는 그 꿈을 꾸는 것을 더 원하게 됐고. 말이 통하게 된 이후로는 김독자를 만나는 것도 꽤 즐거운 일 중 하나가 됐다. 이렇게 즐겁고 몸도 가벼운데, 아플 리가 없다. 몸 상태가 이상한 것도 아니고 말이다.
✝
”김독자.“
”응?“
”너는 왜 나한테 아무것도 안 하지?“
”전에도 말했듯이, 너랑 내가 만난 건 실수라니까? 그런데 손까지 대면 내 양심이 아플 거 아냐…….“
”흠.“
”왜. 뭐라도 해주길 원해?“
평소와 같은 꿈. 이제는 붕 뜬 것 같은 느낌도 하얀 꽃이 가득한 이 장소도 검은 날개의 김독자도 익숙해졌다. 그리고 이 점점 이 익숙한 기분이 좋아서 수면 시간을 늘리기 시작했다. 잠이 오지 않아도 억지로 잠을 청하면서 나는 김독자를 만나러 갔다. 왜 이러는 건지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냥 계속 김독자가 만나고 싶었다. 몸이 가벼워져서 그런가? 꼭 김독자와의 만남에 길들여지는 것 같았다. 이미 길들여진 걸까. 나는 이제는 편해진 김독자에게 헛소리까지 내뱉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무것도 안 하냐고 물었을 뿐인데, 뭐라고 해주길 원하냐는 대답을 하며 김독자는 갑작스레 내게 바짝 다가왔다.
쿵쿵. 쿵쿵 울리는 나의 심장박동 소리. 김독자는 꿈속의 인물이라 그런 것인지 아니면 인큐버스여서 그런 것인지-사실 아직도 인큐버스임을 믿고 있지는 않다. 우연히 이어지는 꿈이겠지.- 오로지 나의 심장박동 소리만이 둥둥 울렸다.
”농담이야. 그렇게 굳어있지 마.“
눈앞의 김독자는 피식 웃더니, 장난스레 내 이마에 ‘쪽’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췄다.
”이런 거라도 해주길 바랐어?“
”윽, 김…. 독자…. 무슨……!“
”장난이야. 장난.“
”읏…….“
김독자는 장난이라고 했지만, 사실 딱히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갑작스러워서 당황스러웠을 뿐. 자주 보면 정든다는 말이 있는데, 어쩌면 나는 그와 정이 든 걸지도 모르겠다. 이러다가 이 꿈을 더는 안 꾸게 되면 어떡하지? 어쩌면 그가, 김독자가 그리워질지도 모른다.
”…혁아, 중혁아?“
김독자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뒤늦게 정신이 퍼뜩 들었다.
”중혁아, 왜 그래?“
”아…. 무것도 아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어차피 여긴 너한텐 꿈속일 뿐인걸.“
”그렇……지.“
”깨어나고 나면 다 잊어버릴 거잖아. 여기선 편하게 있어.“
”…….“
”…왜 그래?“
”깨어나도 널 잊고 싶지 않다.“
”……뭐?“
”여기에 있을 때…. 마음이 편하다. 나도…. 나도 잘 모르겠다. 복잡하군.“
”……중혁아. 그러면, 만약에……. 아주 만약에 네가 여기 계속 있을 방법이 있다고 하면……. 여기 계속 있어 줄 거야?“
”그런 방법이 있을 리가. 너랑 내가 만나는 건 꿈속에서나 가능하지 않나.“
”그러니까 아주 만약에…. 라고 했잖아.“
”글쎄. 식물인간이 된다거나, 영원한 잠을 자는 그런 게 아니라면.“
”……좋아.“
말이 끝나는 순간 보이는 김독자의 표정이 미소짓는 것처럼 보였다. 아, 점점 흐릿하던 김독자의 얼굴도 어느새 또렷할 정도로 보이었다. 이제 더는 이 세계가 흐릿하지 않았다.
✝
그 이후, 그가 다시 꿈에 나오지 않은 지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나는 짧은 새에 그에게 혹은 그 꿈이 주는 기분에 완전히 빠져들었던 것인지, 계속해서 수면을 좇았다. 전처럼 잠이 오지 않아도 잠들기 위해 애를 쓰는 것은 기본이고 이제는 수면제까지 복용하기 시작했다. 여러 이유로 대량의 수면제를 처방받는 것도 불가능하여, 이곳저곳 병원을 돌 정도로 나는 그에게 빠져 들어있었다.
언제부터였지?
’진지하게 조언해주는 거야. 진짜 아파 보여 너.‘
그때부터였나? 어쩌면 붕 뜬 것 같던 느낌은 내면의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은 텅 빈 껍데기만 남게 된 거겠지. 지금의 나는 내가 아니었다. 김독자와 함께하던 그 공간. 거기에서만 나는 내가 될 수 있었다. 김독자. 너는 어디에 있지?
가만히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일상에서도 잠이 쏟아지던 전과는 다르게 지금은 누워서 눈을 감고 있어도 잠이 들 수가 없다. 어떠한 무언가가 나의 안식을 방해하는 것만 같았다. 차라리…. 차라리……. 영원히 자신과 함께하겠냐는 김독자의 말에 ’죽는 것만 아니라면’이라고 답한 과거가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때 왜 그런 대답을 했을까. 죽어도 상관없다고 답했다면, 나는 너의 세계에 갈 수 있었을까.
몸을 뒤척였다. 부스럭거리는 천의 마찰 소리조차 나의 잠을 깨우는 소음처럼 들렸다. 쿵……. 쿵……. 느리게 뛰는 심장박동 소리조차도 괴로웠다. 이 소리가 나지 않게 되면, 영원한 잠에 빠질 수 있을 텐데. 그렇게 되면…. 어쩌면…. 그곳으로 다시 갈 수도 있을 텐데. 다시 한번만. 딱 한 번만 더 하얀 꽃이 가득 피어있던 그곳을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다.
✝
"이 세계에 넘어온 걸 환영해. '나'의 중혁아."
이건 꿈인가? 아니면 현실인가? 몽롱해진 머리는 현실과 꿈의 구분이 어려웠다. 언제부터 꿈이었지?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김독자도 현실인가. 꿈인가? 나는 언제 잠이 들었지? 간절히 원해서 이루어진 건가. 나의 바람이?
"중혁아, 나는 꿈이 아니야. 이제 여긴 너의 삶이 될 거야."
눈앞에 있는 남자, 김독자가 나를 향해 미소지었다. 더는 그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이지 않았다. 또렷하다고 생각했던 그때보다 더, 안개를 걷어낸 것처럼 명확한 그의 얼굴이 나의 눈 안에 꽂혔다.
빛나는 별과 같이 반짝이는 그의 눈이 나를 응시하는데, 그 기분이 꼭 그의 세계로 몸이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아, 그렇구나. 나는 꿈을 꾼 것이구나. 아주 오래된 꿈을 꿨을 뿐이구나.
그것을 깨닫자 몸이 가벼웠다. 이 세계가 나를 환영해주고 있다는 기분까지 들었다. 아니 어쩌면…. 나는 이 세계의 어떠한 소유물이 된 걸지도 모른다. 타인의 품에 안긴 것 같은 포근한 기분이 밀려왔다. 그리고 환하게 미소짓는 김독자의 얼굴과 대조되는 어두운 세 겹의 날개가 나를 감싸 안았다.
“드디어 계획대로 된 거야. 유중혁. 나의 중혁아.”
“나, 의…. 김독자…….”
“너는 날 떠나지 않을 거지. 중혁아?”
내 앞의 그는 나를 품에 안은 채 몸을 숙여, 나의 이마에 입을 맞춰왔다. 그 순간 느껴지는 희열, 기쁨, 환희, 찬미. 그의 작은 입맞춤에도 나는 비로써 구원을 얻은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전에 살던 ‘꿈’에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감각이 몸을 덮어왔다. 아아, 나는 이 사람에게 벗어날 수가 없겠구나. 그렇게 확신한 나는 그의 품에 더욱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의 작은 입맞춤에 나 또한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는 것으로 답했다. 영원한 나의 세계. 나의 김독자. 너의 유중혁.
이마 키스
변하지 않을 사랑, 상대방에 대한 축복
